[SC칼럼] 하일성 '아내의 여유있는 애교'
기사입력 2000년 03월 02일 15시 10분
`딩동∼'
초인종을 누르자 아내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구 또 잔소리깨나 듣게 생겼구나."
늘 늦게 다니는 지라 만성도 될법한데 아내는 아내대로 잔소리가 늘어가고 나는 나대로 현관문 앞에서 심호흡을 하는 버릇이 생겼다.
죽는 시늉하며 들어갈까, 아니면 화난 표정을 지을까? 그것도 아니면 아픈 표정을….
하지만 감독으로 치면 거장과는 거리가 먼 나는 항상 안주인의 분위기에 맞춰 모 회장님의 시류에 따라 살았다는 말처럼 무작전으로 나간다.
그러면 십중팔구는 병살타를 당해서 잠든 후에까지 시달림을 당하는가 하면 재수좋은 날은 무실점으로 다음날 아침을 맞게 된다.
하지만 그날 나를 맞이하는 아내의 얼굴이 보통 때와는 영 달랐다. 묘한 미소와 함께 나긋나긋함이 있었다.
"당신 뭐 좋은 일 있었어" 긴장이 풀어지면서 순간적으로 내가 물었다. "좋은 일은 무슨 좋은 일이에요. 계절도 바뀌고 해서 당신 와이셔츠와 넥타이 좀 샀어요. 당신 방송국에 자주 나가니까 패션에도 신경 좀 쓰세요. 얼굴이야 견적이 안나오더라도 그런걸로나 좀 캄푸라치(?)가 될 수 있잖아요."
"아니 잘 나가다가 견적은 또 무슨 소리야" "아무튼 빨리 들어와서 입어봐요" 그렇게 말하고 아내는 거실 소파쪽으로 걸어갔다. 소파 등받이에는 와이셔츠 세벌과 넥타이 여섯개가 줄줄이 얹혀 있었다.
"이 셔츠에다 요 넥타이 어때요? 어울릴 것 같죠?" 양복도 벗을 겨를 없이 아내가 셔츠와 넥타이를 목에 댔다가 떼었다가 수선을 떨었다. "참 오늘 이 마누라가 어떻게 됐나. 당신 오늘 왜 안하던 짓을 하는거야."
"왜? 그러기는요. 애들 학비 생활비 생각해서 그동안 당신 옷에도 제대로 신경 못쓴것 같고…."
하여튼 그날 나는 오랜만에 무실점에다 아내의 선물공세 애교에 두다리를 쭉 뻗고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방송국에 출연하기 위해 구두를 신고 있는데 아내가 차분하게 말을 건네왔다.
"마침 어제 차를 안가지고 나가서 제가 청소를 했어요. 무슨 차안에 그렇게 쓰레기가 많아요. 신문쪼가리 휴지… 쓰레기통도 아니고."
순간 나는 뒤통수를 맞는 것 같은 느낌으로 허둥지둥 아파트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문을 열고 보조함을 열었다. 며칠전 방송출연료로 받은 돈이 있던 자리에는 용각산 한 곽이 놓여있고 그 위의 작은 메지가 시선에 잡혔다.
"우리의 전재산은 당신 몫이에요."
`돈 모으려면 장가들어라'는 주위의 어른들이 내게 하시던 말씀이 생각났다. 인생의 경험에서 우러난 생활철학이라는 생각이 든다.
[야구 해설가 hisbase＠chollian.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