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카사노바] 가짜 재미교포 사업가 (2)
기사입력 2000년 02월 28일 14시 00분
옆자리 신사가 건네준 명함은 온통 영문으로 돼 있었다. 박사장은 대학을 졸업한뒤 별로 영어를 접해볼 기회가 없어 낯설게만 느껴졌다. 더듬더듬 읽어보니 `○○○케이터링 회장 강성수'로 돼 있었다. 무슨 외식업체인 것 같았다.
같은 사업가인데다 그것도 미국에서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니 반가운 마음이 생겼다. 기업을 이끌어가느라 고독감을 느끼고 있던 터에 위안이 돼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도 생겼다.
저녁 약속에 응한건 당연한 일. 그러나 열차안에서 만난 사람에게 명함을 준다는게 선듯 내키지 않아 명함을 주지 않고 그저 `박여사'라고만 했다.
이들은 그날 저녁 7시 해운대의 한 호텔 커피숍에서 만났다. 양식당에서 스테이크를 들었다. 포크와 나이프를 쥐고 고기를 자르고 이따금 와인잔을 기울이며 목을 축이는 강회장의 모습이 박사장의 눈에는 퍽 세련되고 기품이 있어 보였다.
"하시는 사업이 외식업 분야이신 것 같던데…."
"네, 미국 전역에 직영점과 체인점을 조금 가지고 있습니다. 본사는 LA에 있구요."
강회장은 박사장에게 자신에 대해 관심을 갖는듯 하자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미국 유학생 출신인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지요. 그곳에서 학교를 다녔고 캘리포니아 주립대를 나와 미국인 회사에 근무하다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지요. 실패해 다시 시작하고 되는듯 싶다 망하기를 반복한 끝에 10년전 지금의 사업을 시작, 자리를 잡았습니다."
식사를 마친뒤 이들은 해운대 백사장을 걸었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쐬면서 달빛에 나란히 그림자를 그리며 말없이 걸었다. 박사장은 언제나 혼자였던 자신의 곁에 남자가 있다는게 왠지 든든한 것 같았고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남편이 되돌아온듯한 착각마저 느꼈다.
그때였다. 강회장이 나지막한 소리로 "바다가 우는 걸 본 일이 있는가/바다가 흐느끼는 걸 본 일이 있는가/바다가 혼자서 혼자서"하며 조병화의 시 `바다'를 읊었다.
박사장이 예전에 읽었던 기억을 더듬어 "스스로의 가슴을 깎아내리는/그 흐느끼는 울음소리를 들은 일이 있는가"하고 다음 귀절을 읊자 강회장은 박사장을 돌아보며 환하게 웃었다.
박사장은 시를 읊다 강회장 역시 혼자인 것다는 느낌이 들어 "부인께서는…"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강회장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네, 7년전 사별했습니다"고 했다. 얼마간 입을 다물고 있더니 "박여사께는 훌륭한 부군이 계시겠죠?"하고 물었다.
박사장은 머뭇거리다 "저도 혼자예요."
`과부와 홀아비의 만남.' 그것도 한적한 밤바닷가에서. 참으로 기연이 아닐 수 없었다. 둘은 아무말도 하지 않은채 하염없이 걷기만 했다.
강회장의 손이 슬며시 박사장의 손을 잡았다. 박사장은 처음엔 빼려 했으나 그동안 까맣게 잊고 지냈던 남자가 가까이 다가와 있다는 걸 느꼈다. 강회장의 손길이 퍽이나 따뜻하게 느껴졌다.
둘은 손을 잡고 말없이 걸었다. 얼마를 걷다 호텔로 자연스럽게 들어섰다. 강회장의 손이 이끌었지만 박사장은 거부하지 않았다.
10년을 잊고 지내온 남자. 남자의 체취를 한번 느껴보고 싶어졌던 것이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남자와 하룻밤쯤 지낸들 무슨 일이 있으랴.'는 생각에서 오랜만에 남자의 품에 안겨보기로 했다.
룸으로 들어서자 강회장은 박사장을 포근하게 감싸안았다. 박사장은 강회장에게 모든 것을 맡겼고 강회장은 박사장을 한꺼풀씩 벗겨나갔다. 박사장은 강회장의 품으로 더욱 깊이 파고 들었고 강회장은 그러는 박사장을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거칠게 연주했다. 박사장은 강회장의 연주에 맞춰 연신 `음'을 토해냈다. 박사장에게 그날밤은 길고도 깊고 감미로운 밤이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