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남자] 투쟁 (23)

기사입력 2000년 02월 22일 14시 25분


베이징 북서쪽에 자리잡은 이화원은 중국의 역대 황제들의 행궁으로 사용된 유적들이 즐비한 베이징 최대의 공원이다. 6월의 날씨가 화창한 때문인지 동궁문 앞은 관광객과 소풍객으로 혼잡했다.

이대진의 팔을 낀 정현희는 밝은 표정이어서 두 사람은 마치 소풍나온 애인처럼 보였다. 동궁문 오른쪽 기둥 앞에 섰을 때 정현희가 바짝 다가붙었다.

"우리 사진찍어요."

정현희가 눈으로 앞쪽의 계단 밑에서 얼쩡대는 사진사를 가리켰다.

"지금 내 표정을 나중에 보고 싶어요."

"이봐, 정신차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대진도 웃었다. 정현희가 이대진의 한쪽 팔을 두 팔로 감아 안고는 온몸을 붙여왔다.

"곰곰이 생각했는데 보스가 약해졌을 때 난 옆에 남아있을 것 같아요."

"어젯밤에 곰곰이 생각할 시간이 있었던 것 같지가 않다."

그러자 정현희가 흥흥 웃었다. 그때 사내 하나가 다가왔다. 30대 중후반 쯤의 얼굴에 키가 컸지만 마른 체격이었다.

"정현희씨 맞습니까?"

"그럼 선생이 장용수씬가요?"

놀란 정현희가 눈만 크게 떴으므로 이대진이 물었다. 사내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내가 장용수올시다."

검은 피부에 긴 얼굴의 장용수는 눈동자를 쉴새없이 움직였으므로 불안정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럼 같이 가실까요?"

턱으로 계단 쪽을 가리키며 장용수가 앞장을 섰다. 이대진과 정현희도 서둘러 따랐다.

"지금 어디로 가는 겁니까?"

옆으로 붙은 이대진이 묻자 장용수가 힐끗 시선을 주었다.

"먼저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장용수가 들어선 곳은 동궁문에서 위쪽으로 100@쯤 떨어진 길가의 허름한 식당이었다. 나무 식탁이 대여섯 개 뿐인 식당 안에는 손님이 한 사람도 없어 썰렁했다. 그들이 자리잡고 앉자 종업원이 다가왔다. 장용수가 유창한 북경어로 식사를 주문하고는 이대진을 보았다.

"국수를 시켰습니다. 괜찮겠지요?"

"상관없습니다."

"두 분은 부부 사이십니까?"

"그렇게 보입니까?"

이대진이 정색하고 되물었으므로 장용수가 입술만 비틀고 웃었다.

"다정하게 보여서요."

"김성복씨 일행을 보호하고 있다고 하셨는데 서로 아는 사이신가요?"

이대진이 묻자 이제는 정색한 장용수가 머리를 저었다.

"모르는 사이입니다. 그저 동포니까 도와주고 있는 겁니다."

"좋은 일을 하십니다."

"그런데 탈북자를 돕는 단체라고 하셨는데 어떤 단체에 계십니까? 혹시 안명호 목사님을 아십니까?

"우린 극동협회라고 세운지 얼마 안되는 자선단체지요. 안명호 목사는 모릅니다."

"외교부하고 잘 통하는 모양이지요?"

"정보나 얻는 관계일 뿐입니다."

"자본금은 넉넉합니까?"

장용수가 그렇게 묻자 이대진이 퍼뜩 시선을 들었고 이제까지 잠자코만 있던 정현희가 나섰다.

"자본금이 이 일하고 무슨 상관이 있지요? 다섯 분을 모셔갈 경비는 있습니다."

"여비 가지고는 안된단 말입니다."

정현희의 시선을 받은 장용수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탈북자인데다 전쟁포로였던 분들이 아닙니까? 한국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분들이겠지요. 그래서 경비가 무척 많이 들었단 말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