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 사방서 울려퍼진'화개장터'…노래가 현실로
기사입력 2000년 02월 20일 23시 01분
어렸을 때 우리는 논길이나 골목길에서 깜깜해질 때까지 정신없이 뛰놀지 않았던가.
빌어먹을 컴퓨터 시대다, 증권시대다 하면서 우리는 함께 뛰노는 일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사람들은 모두 사나워졌다.
그리하여 이번에 함께 뛰노는 일이 대규모적으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벌어졌다.
"얘들아 나와라. 나와서 뛰어 놀자. 경상도 하동에서 전라도 광양까지 뛰어가보자!"이렇게 된 것이다.
스포츠조선과 한국실업육상연맹 둘이서 일일이 소리쳐 함께 뛰어놀 사람을 불러 모았는데 무려 1천명이 훨씬 넘었다.
그래서 일요일 아침 한꺼번에 뛰었다. 어렸을 때 처럼 한도 끝도 없이 뛰었다. 일대 뜀박질의 잔치였다.
음악적으로 표현하자면 2천대의 팀파니가 지축을 쿵쿵 때리는 거대한 교향곡이였다. 교향곡의 제목이 멋졌다. `영호남의 만남'이라는 짜릿한 제목이었다.
왜 일개 가수에 불과한 조영남이가 이토록 영호남의 만남에 흥분 했는가. 거기엔 이유가 있다.
잘난척 하려는게 아니다.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영호남'을 가슴저리며 혼자서 불러왔다. 그리고 염원해왔다. 나 혼자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에 발 붙이고 사는 모든 사람들이 너나 할것없이 `영호남'을 친형제처럼 대하는 그날을 말이다.
세상이 다 아는 `화개장터'라는 노래를 일찌감치 작사 작곡 노래까지 해치운 사람이 누군가. `영호남'의 제일 친한 친구 `조영남'이었다.
`광양에선 삐걱삐걱 나룻배타고 하동에선 부릉부릉 버스를 타고' 어쩌구 저쩌구 하는 노랫말을 내가 손수 만들지 않았는가. 내가 꿨던 꿈은 그냥 장난삼아서 꿔본 꿈이 아니었다. 그리고 실제로 내 노랫말처럼 꿈이 이루어졌다. 황영조를 비롯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1천명이 넘는 친구들이 경상도 하동군수가 쏜 출발신호 총성에 맞추어 광양 시장님이 기다리는 목적지 전라도 광양 땅을 향해 뛰었다.
황영조 이봉주 같은 마라톤 선수들이 뛰는 총 42.195㎞의 절반되는 21.0975㎞를 뛴 것이다. 여기선 누가누가 일등으로 뛰었다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다.
중요한 건 하나다. 전국 사방 팔방에서 몰려온 남녀노소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가대표 마라톤 선수가 되어, 경상도 땅에서 전라도 땅을 가로질러 뛰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이 섬진강을 가로질러 뛰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키워드다.
섬진강은 태고로부터 경상도와 전라도의 딱 한가운데를 흘렀다. 그런데 경상도 사람들이 강건너 사람들을 공연히 미워하고 전라도 사람들도 저쪽 강건너 사람들을 괜히 미워하면서 애꿎은 우리의 섬진강은 강줄기가 아니라 마치 베를린 장벽, 만리장성으로 변했다. 까닭도 없이 한많은 섬진강으로 곡조가 슬퍼진 것이다.
그러나 허구헌날 슬픈 노래만 부르고 앉아 있을수는 없었다.
대망의 2000년 2월 20일 쾌청한 일요일 아침 1천여명의 대한민국 남녀노소 건각들은 동서의 장벽과 장성을 무너뜨리며 경쾌하게 섬진강 대교를 글자 그대로 뛰어넘었다.
말로만 허울좋게 지역감정을 뛰어넘자는게 아니었다. 그냥 건성 노래로만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어쩌구 저쩌구가 아니었다.
몸 전체로, 마음 전체로 둘이 아닌 하나가 되어 모두의 두 팔과 두 다리로 직접 지역감정을 넘어섰고 그야말로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유구한 상징의 강 섬진강을 뛰어서 넘었다. 철조망도 경계선도 몽땅 쓸려 내려갔다.
이것은 실제 상황이었다.
싸한 겨울아침 어깨를 부딪히며 뛰어가는 선수들의 입에선 입김이, 코에선 콧김이 나왔을 뿐 이들 사이엔 긴 말이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 선수 모두는 한 고향 한 대한민국에서 왔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마무리를 짓자.
나는 벌써부터 깨닫고 있었다. 동과 서는 화합해야 한다. 전라도와 경상도는 같은 형제다. 그래서 `화개장터'라는 노래까지 만든거였다. 그리고 내 노래의 소박한 꿈은 내가 보는 앞에서 이루어졌다.
사방에서 내가 만든 노래 `화개장터'가 울려퍼졌고 그 경쾌한 리듬을 타고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뜀박질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의 거대한 무리가 새로 거듭 태어난 평화의 상징, 화합의 상징 섬진강을 스스로의 두 발로 뛰어 넘었다.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로 지르는 섬진강은 더이상 아픔의 강, 철조망의 강이 아니었고 미움의 강도 아니었다.
이제는 나는 여한이 없다. 내가 죽기전에 적어도 한가지 소원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