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남자] 투쟁 (21)

기사입력 2000년 02월 20일 15시 32분


노영주와 헤어져 방으로 돌아온 이대진과 정현희는 둥근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았다.

"지금 전화할까요?"

눈을 반짝이며 정현희가 묻자 이대진이 머리를 저었다.

"먼저 의논을 하자. 이 전화번호는 탈북자들이 묵고 있는 집일 것 같나?"

"글쎄요."

정현희가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어쨌든 연락은 되는 곳 아닌가요?"

"이건 탈북자들이 연락처로 사용하는 곳일 수도 있어. 묵고 있는 곳을 알려줬다가 발각이 되면 끝장이 나니까 말이야."

"그럴 수도 있겠네요."

"만일 탈북자와 연락이 되었을 때 넌 너를 어떻게 소개할 테냐?"

"저를요?"

정현희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가 이내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극동전자 특수팀원이라고 하면 믿지 않을지도 모르겠네요."

"50년을 지옥 속에서 보내다가 탈북한 사람들이야. 노인들이지만 잔뜩 경계를 하고 앞뒤를 잴 것이다. 그들이 믿도록 해야돼."

"대사관 직원이라고 할까요?"

"전화를 받았던 노영주씨 한테서 연락을 받았다고 해. 탈북자를 돕는 한국의 비공식 단체라고."

정현희가 머리를 끄덕였다.

"역시 보스는 주도면밀하시군요. 더 하실 말씀은?"

"그 다음에는 네 수단대로 해봐."

다시 머리를 끄덕인 정현희가 앞에 놓인 전화기를 끌어 당겼다. 정현희가 다이얼을 돌리는 동안 이대진은 냉장고 위의 선반에서 위스키병을 집어 탁자 위에 놓았고 잔과 마른안주까지 준비했다.

벨이 10여차례 울리고 나서 철컥 소리와 함께 "여보세요"하고 한국어가 들렸을 때 정현희는 바짝 몸을 굳혔다.

"여보세요. 거기 김성복씨 계신가요?"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사내의 목소리는 굵었지만 전혀 북한식 억양이 없었고 매끄러웠다. 정현희는 전화기를 고쳐 쥐었다.

"전 노영주씨한테서 연락을 받고 전화를 드리는 사람인데요. 대사관의 노영주씨 아시지요?"

"압니다. 그럼 댁도 대사관에 계시는가요?"

"아녜요. 전 탈북자를 돕는 한국의 비공식 단체에 있는 사람입니다. 선생님이 김성복씨세요?"

"아닙니다. 난 김성복씨를 도와주고 있는 동포올시다."

"그러세요? 그럼 김성복씨가 지금 그곳에 계신가요? 다른 네 분도."

"이곳에는 없지만 내가 모두 보호하고 있지요."

"그럼 저희들이 만나뵐 수 있을까요?"

"좋습니다. 그런데 지금 계신 곳이 어디지요?"

"시내 음식점에서 걸고 있어요."

"먼저 나하고 만나서 이야기를 하십시다. 잘 알고 계시겠지만 공안한테 잡히면 북조선으로 추방당하게 되니까요. 조심해야 된단 말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럼 만날 장소를 말씀해 주세요."

"내일 오후 1시에 이화원의 동궁문 앞에서 만납시다. 동궁문의 오른쪽에 서 계시오."

"그런데 어떻게 알아보지요? 선생님 성함이라도 알려주셔야."

"난 장용수올시다."

"전 정현희에요. 그리고 남자 한 분과 동행으로 둘이서 나갈 거에요."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쪽이 한 말을 전해주자 술잔을 들고 있던 이대진이 입맛을 다셨다.

"그쪽도 꽤 머리를 쓰는 친구구만 그래. 그것이 어떤 방향인지는 모르겠지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