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리포트] 지금 일본은 - 한국식당과 일본인손님
기사입력 2000년 02월 20일 15시 32분
방송관계 매체들이 몰려있는 도쿄 아카사카와 록번기의 빌딩숲.
아카사카에는 마이니치신문 계열의 TBS@TV가, 록번기에는 아사히신문 계열의 텔레비아사히가 자리잡고 있다. 그 주위에는 방송관련 업체들과 프로덕션 사무실이 단지를 이루고 있다.
특히 아카사카는 불과 5∼6년전까지만 해도 `코리아타운'이라고 할만큼 한국식당과 한국술집으로 거리가 메워졌었다. 하지만 일본 거품경제가 붕괴되면서 지금은 겨우 명맥만을 유지할 정도다.
그렇지만 방송관계자 식도락가들은 여전하다. 한국음식이라면 비빔밥부터 궁중요리까지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유서가 깊은 아카사카에는 `한국요리 마니아들'로 늘 붐빈다. 전직 한국주재원이나 특파원 등 한국에 관심이 있거나 한두번 이라도 한국을 다녀온 이들을 만날 때면 으례 여기서 만나곤 한다. 내가 원해서가 아니다. 그들이 이곳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며칠 전 나는 다큐멘터리를 전문으로 제작하는 `보우프로덕션' 사장인 마키씨를 만나기 위해 록번기에 갔다. DHC출판사의 기무라 부장과 함께였다. 마키씨는 일본방송계에서 소문난 여걸. 50대 사장인 그녀는 한국음식에 관한 한 한국인인 나보다 정보가 빠르다. 어느 한국식당에 가면 파전이 맛있고, 어디에 싸고 맛있는 갈비집이 생겼는지…, 이런 소식들을 항상 그녀에게서 듣곤 한다.
DHC출판사의 기무라 부장도 50대의 여성으로 15년전에 한국어를 배운 경험이 있는 한국마니아. 독자적으로 출판사를 경영하고 있는 그녀 남편도 한국음식이라면 아무리 매운 김치도 오케이다.
특이한 것은 기무라씨 부부는 각자 다른 성(姓)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결혼한 일본여성들은 서양의 경우처럼 자신의 성을 버리고 남편의 성을 따른다. 예를 들면 `나카무라 기미코'라는 여성이 `다나카 히로시'라는 남성과 결혼하면 `다나카 기미코'가 된다. 하지만 기무라씨는 `기시'라는 남편 성을 따르지 않고 본래 자신의 성을 그대로 쓰고 있다.
아무튼 이날 점심식사의 메뉴는 당연히 한국요리였다.
요즘 일본에서 가장 인기있는 한국요리는 돌솥비빔밥. 그러다보니 한국의 돌솥을 수입하여 파는 가게도 생겼다. 어쨋든 우리 여자 셋은 돌솥비빔밥을 시켰다.
그런데 마키 사장이 고추장을 넣지 않고 밥을 비볐다. 반면 기무라 부장은 밑반찬으로 나온 계란부침에까지 고추장을 듬뿍 발라 먹는다. 아이들이 소시지에 토마토 케첩을 발라 먹듯이. 기무라 부장은 집에서도 가끔 그렇게 먹는단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맵지 않아요?"
"전혀!"
다시 마키 사장을 쳐다봤다. 여전히 고추장을 넣지 않고 비빔밥을 먹었다. 매워서 그냥 먹겠단다. 그러면서도 김치는 그녀 독차지다. 매운 김치를 혼자서 다 먹어치웠다. 내가 느끼기엔 밥에 비벼먹는 달콤한 양념고추장보다는 김치가 훨씬 매웠다.
똑같은 일본여성인데도 한국음식에 대한 미각은 어쩜 이렇게 다를까 생각하며 내가 다시 물었다. 어떻게 해서 한국음식을 좋아하게 됐냐고.
마치 사장이 말했다.
"물론 한국음식이 맛있어서겠지만 내가 한국식당을 자주 찾는 이유는 이 식당 주인부부의 성실함 때문이기도 하죠. 주인 부부는 보통 하루 17∼18시간을 일해요. 우리처럼 밤낮 구별없이 일해야 하는 사람들은 24시간 영업을 하는 식당이 너무도 고마와요. 10년을 넘게 봐 왔지만 늘 부지런해요. 정말 열심히 사는 이들 부부를 보고 이 식당에 오지만, 이제는 한국음식에 길들어질만큼 길들어진 것도 사실이에요. 간혹 일에 지쳐서 의기소침해 있을 때 한국식당에 오면 기운이 나요. 왜 있잖아요? 김치를 먹으면 정신이 번쩍 드는거."
맞장구를 치는 기무라 부장.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피로해 있을 때 한국식당에 와 그 에너지를 보충한다는 마키 사장과 기무라 부장.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