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남자] 투쟁 (18)

기사입력 2000년 02월 16일 14시 17분


"곤란한데."

김재선은 이대진의 말이 끝나자 대뜸 머리를 기울이며 말했다. 심각한 표정이었다.

"간단한 일이 아니오. 지난번 경우처럼 중국 정부는 가차없이 그들을 송환시켜 버릴테니까. 유엔의 난민 지위같은 건 무시해 버릴거요."

"내가 그런 식으로 투쟁하자는 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이 사건을 알려준 외교부 담당자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정색한 이대진이 김재선을 보았다. 시청 근처 호텔의 커피숍 안이다. 김재선은 이대진의 연락을 받고는 곧장 달려왔다가 내막을 듣고나서 조금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로서는 난데없는 사건일 것이다. 그가 눈을 껌벅이며 이대진을 보았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그들을 비밀리에 밀입국 시키자는 겁니다. 그건 가능하겠지요?"

"태국이나 베트남을 통해서 말이오?"

"여권을 위조하든지 아예 밀입국선에 태우든지 방법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건 더 곤란한데."

쓴웃음을 지은 김재선이 이제는 머리까지 저었다.

"이봐요. 그런 작전이 실패하면 사태는 더 악화됩니다. 더욱이 나는 공무원이오. 내 임의로 행동할 수가 없다는 걸 이형은 잘 알고 있지 않소?"

"전쟁포로로 50년 동안 잡혀있다가 탈출해 왔다는데 이렇게 쉬쉬만 해야 됩니까?"

이대진이 눈을 치켜뜨자 김재선이 입맛을 다셨다.

"어쨌든 내가 보고는 하겠소. 그냥 넘어가지는 않습니다."

"제보자의 안전을 보장해 주십시오."

"노력하지요."

의자에 등을 기댄 김재선이 이대진을 향해 웃어 보였다.

"언제는 달러를 바꾼 것이 우리 돈이라고 말해달라더니 이젠 탈북자 문제를 갖고 오셨군 그래. 이형은 우리 회사에서 유명한 인물이 될 것 같소."

김재선과 헤어진 이대진이 회사로 돌아 왔을 때는 오후 2시쯤이었다. 책상에 앉은 그의 앞으로 정현희가 다가와 섰다.

"외출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무슨 일이에요?"

정현희가 맑은 눈으로 그를 내려다 보았다.

"북한 오더 문제인가요?"

"북한 오더라. 말이 되는 군."

손짓으로 정현희를 책상 가까이 부른 다음 이대진이 낮은 목소리로 탈북자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정현희의 얼굴 표정은 세번 바뀌었다. 처음에는 놀란듯 눈이 커지더니 중간쯤에서는 이맛살이 찌푸려졌고 말을 마쳤을 때는 쓴웃음을 지었다.

"보스, 도대체 어쩌시려고. 이제는 인권사업에 나설 참이세요?"

"네가 그렇게 나올 줄 알았어."

따라 웃고난 이대진이 정색했다.

"이야기를 들은 이상 나는 모른 척하고 넘어가지 못하겠다."

"국정원에다 말해 주었으면 그것으로 손을 떼는 것이 정상 아닐까요?"

"그쪽도 나설 입장이 못돼."

"그럼 보스가 나서겠단 말인가요?"

이제는 정현희도 정색했다.

"뜻밖이네요. 보스가 타산을 떠나서 이렇게까지 무모할 줄은."

"이런 빌어먹을."

눈을 치켜뜬 이대진이 정현희를 노려보았다.

"날 과소평가 하지마라."

"아니, 이제까지 과대평가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현희가 싱긋 웃었다.

"절 부르신 이유는 그 사업에 참여시키려는 의도지요?"

"내키지 않으면 빠져."

그러자 정현희가 머리를 저었다.

"그냥 보스를 따를게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