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이제하씨 중편소설 `풍경의 내부' 펴내
기사입력 2000년 02월 14일 14시 23분
`자신이 오물투성이므로 상대는 순결해야 한다는 오만방자한 독선…엘리트로 자처하던 놈이 여태도 그런 거지발싸개같은 독선을 그냥 껴안고 사는 거야?…육체의 순결이 곧 정신의 순결이라고 우기고 싶겠지? 터무니없는 궤변 깔지 마.'
`예술가소설'이란 독특한 작품세계를 구축해 온 작가 이제하씨(63)가 순결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파헤친 중편소설 `풍경의 내부'(작가정신)를 펴냈다. 서정주의 시 `신부'에서 모티브를 얻어 쓴 작품이다.
성 담론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시대, 이씨는 순결이란 고전적인 주제를 진지하게 탐구한다. 순결의 문제를 통해, 진정한 삶을 방해하는 권위와 인습을 매섭게 질타한다. 삶을 구속하는 관습과 끊임없이 싸워온 기존 작품세계와 맥을 같이 한다.
행정고시 1차를 패스한 엘리트인 `나'는 지방 유지의 딸 희수와 결혼한다. 그러나 첫날밤에 신부가 이미 강제결혼했던 사실을 알고 그 길로 도망쳐 나온다. 이후 고시공부도 팽개친 채 서울에서 숨어 산다.
그러다가 `나'는 우연히 정신병원에서 나와 창녀행세를 하는 서례란 여자를 만난다. 서례와 같이 살면서, 순결이라는 남성적 권력과 이데올로기의 그물을 벗어나게 된다. `나'는 용서를 빌기 위해 희수를 찾아가지만, 희수는 이미 다른 남자에게 능욕당한 상태.
결국 남성인 `나'는 서정주의 시 `신부'에서 집나간 신랑을 기다리가 재가 된 신부처럼, 희수를 기다린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순결 이데올로기'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차원에까지 잇닿아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임정식기자 dada＠sports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