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남자] 투쟁 (16)

기사입력 2000년 02월 13일 15시 27분


"중국측은 KPS형 무전기에 대한 최종 도착지 확인을 강화할 계획이야. 따라서 극동전자에 대한 관리를 게을리 해서는 안돼."

아주국장 문형호가 정색하고 말했다. 그는 부하 직원 앞에서는 거의 웃는 표정을 보인 적이 없었고 그 또한 웃음짓는 상사를 별로 겪지 못했다.

"안과장이 극동전자는 책임지도록."

"알겠습니다."

"이번에 잔재주를 부려 후쿠오카에서 신용장을 개설했지만 중국측의 정보로 겨우 막았어. 두번다시 이런일이 되풀이 되어서는 안돼."

"예. 알겠습니다."

문형호가 조금 비껴 앉았으므로 안동성은 절을 하고 국장실을 나왔다. 오전 10시가 조금 못된 시간이었다. 자리에 돌아와 앉은 안동성은 한동안 앞쪽의 벽만 보았다. 중국은 거대한 시장이다. 특히 통상본부 소속인 그로서는 중국시장의 잠재력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더 관심을 가져야할 입장이었다. 앞쪽으로 동료 과장인 김철규가 지나갔으므로 그는 번쩍 머리를 들었다.

"이봐, 김과장."

손짓으로 부르자 김철규가 다가와 옆에 놓인 의자에 털썩 앉았다.

"왜 그래?"

"며칠 전에 중국대사관으로 연락해 왔다는 탈북자 다섯명은 어떻게 되었어?"

"모르겠는데? 연락이 없어."

"다섯명이 모두 전쟁포로 였다면서?"

"글쎄. 전화만 받았다니 알 수가 있어야지. 대사관 쪽에서 그후로 보고가 없는 걸 보면 장난전화일 수도 있어."

안동성이 눈을 껌벅이며 김철규를 보았다. 며칠전에 베이징 주재 한국 대사관에 6．25때 한국군으로 참전했다가 북한군에 포로가 되어 끌려가 50년동안 수용소 생활을 했다는 탈북자 다섯명이 전화를 해왔던 것이다.

지난번에 대사관의 여진원이 탈북자의 전화에 무례하게 응답했다가 방송에 보도되어 여론의 거센 비난을 받은 터라 이번에는 성의있게 기록해서 보고까지 했다. 그러나 그후로 소식이 끊긴 모양이었다.

"이봐, 전쟁포로였던 탈북자가 다섯명이라면 큰 사건 아니야? 그리고 그들이 전화만 달랑 한 통화하고 연락을 끊었을리가 있나?"

"글쎄, 낸들 아나? 대사관에서 그후로 보고가 없는 걸 말이야."

"씨발, 그쪽에서 막은 모양이군 그래."

그러자 김철규가 입술을 비틀고 웃었다.

"전화 한 통화하고 나서 중국 공안한테 잡혔는지도 모르지."

그리고는 김철규가 눈을 크게 뜨고는 안동성을 빤히 보았다.

"왜 그래? 갑자기 왜 탈북자한테 관심을 보이는 거야? 통상본부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고?"

"그냥 물어본 거야."

"이봐, 남의 일에는 신경쓰지마."

자리에서 일어선 김철규가 정색했다.

"높은 놈들이 시킨 대로만 하면 돼."

김철규가 자리를 떴을 때 안동성은 전화기를 들었다. 이대진은 자리에 있었는데 안동성의 목소리를 듣자 반겼다.

"웬일이십니까? 갑자기"

"잘 되어갑니까?"

"예. 덕분에."

짧게 말을 끊는 이대진의 응답에 안동성의 가슴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도 도청까지 주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동지의식이 느껴지면서 든든해졌다.

"오늘 저녁에 술한잔 합시다. 내가 살 테니까."

"내 접대비가 아마 더 여유가 있을 겁니다. 내가 근사한 곳으로 모시지요."

이대진이 웃음띤 목소리로 말하자 안동성의 얼굴에도 웃음이 떠올랐다.

"좋습니다. 내가 팁값은 낼테니까. 그럼."

X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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