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리포트] 재일동포 요코즈나들
기사입력 2000년 02월 08일 14시 19분
"스무살에 건너와서 아무 고생없이 살았어. 어디? (한국에) 안 가. 갈 생각 없어."
85세 노인은 처음부터 한국인이기를 거부하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한국과 관련된 질문에는 내내 묵묵부답이었다. 언제 일본에 건너왔느냐, 고향인 한국에 돌아가고 싶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지면 못 들은 척 하고 다른 이야기를 했다. 인터뷰를 시작한 지 한 시간이 넘어서야 스무 살 때 일본에 건너왔다는 말을 겨우 들을 수 있었다. 그가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이었지만 마음은 착잡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조국을 부정하려는 그의 입장을 어느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69년 스물 여섯살에 요코즈나가 된 한국인 다마노우미는 주위의 권고대로 멀쩡하게 살아있는 아버지를 오래전에 사망한 것으로 발표했다. 물론 한국인이라는 사실도 숨겼다. 그의 일대기를 담은 기록에서는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살아왔다는 삼류 신파극으로 일관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일본인들은 그것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
영웅은 단명한다던가. 71년 10월 다마노우미의 삶도 끝났다. 28세, 요코즈나라는 정상의 위치에서 맞은 죽음이었다. 맹장염이 늑막염으로 번져 수술을 했지만 이미 늦은 때였다.
스모선수에게 메스를 대는 것은 성공률이 반도 안될 만큼 위험한 일이었다. 스모선수들은 몸을 불리기 위해 무리하게 체중을 늘리기 때문에 그만큼 뱃살도 두껍다. 따라서 두꺼운 피부층을 갈라내고 수술을 하는 것은 목숨을 걸지 않고는 불가능했다.
다마노우미의 갑작스런 죽음은 `사망처리'된 아버지를 불러냈다. 아들이 남기고 간 요코즈나의 흔적(우승트로피 등)을 관리하기 위해서였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도 그가 일본인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유명해지고 인기가 높아질수록 우리는 의식적으로 그를 일본인처럼 대했습니다. 나중에는 그가 진짜 일본인이라고 믿어졌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결코 좋은 일이 아니지만 그 당시에는 모두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다마노우미, 아니 윤이기와 중학교 동창인 만화가 고(故) 신타로씨의 증언이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요코즈나.
"그건…제 입장에서 말하기는 곤란합니다. 이해해 주십시요."
역시 재일동포 2세로 요코즈나 출신인 무사시가와의 말이다. 그는 현재 무사시가와 도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일본스모협회감사와 심판위원장을 맡고 있는 거물급 인사다. 재일동포로서 일본스모계에서 경험한 바를 말해달라고 하자 그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자신의 입장을 이해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현역 요코즈나인 무사시마루를 길러냈으며 이번 대회 우승자도 역시 그의 도장에 속해있는 선수였다.
무사시가와가 다른 스모선수들과 함께 식사를 할 때 눈길을 끈 것이 있었다. 그의 앞에 김치가 놓여져 있었던 것이다. 재일동포 후원자들이 매번 돌아가면서 김치를 담가다 준다고 했다. 무사시가와는 스모선수들 사이에서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선배 겸 스승으로 꼽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외에도 현재 형제 요코즈나로 언론의 표적이 되고 있는 다카노하나@와카노하나 형제도 한국계로 알려져 있지만 확인은 되지 않고 있다. 이유는 이들이 인터뷰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 형제의 큰 아버지이자 제 45대 요코즈나였던 초대 와카노하나가 한국인이라고 공개적으로 주장하는 일본인들은 많다. 우에다씨도 그의 저서 `한국인의 저력'에서 이를 공표했고, 전직 스모선수출신 재일동포 진복기씨도 초대 와카노하나가 한국계임을 증언했다(진복기씨는 현재 서울 충무로에서 일식집을 운영하고 있다).
아무튼 일본의 국기로 국민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스모계가 지금 혼란에 싸여 있다. 선수들끼리 미리 짜고 경기를 벌였다는 소문때문이다. 일본 스모협회는 즉각 부인하는 성명을 냈지만 이를 믿는 일본국민들은 아무도 없다.
분명 많은 재일동포가 스모의 정상인 요코즈나에 등극했음에도 일본스모계가 이를 부인하는 것처럼 말이다. 멀쩡한 사람을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망처리'하고 일본인으로 둔갑시킨 것처럼 이번 `승부조작사건'도 `오리발'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는 일본인들이 많다.
일본천황이 경기장을 직접 찾을 정도로 일본정부가 세계적인 스포츠로 키우기 위해 수십년동안 정책적인 지원을 해왔던 스모. 그 스모가 지금 `야오초'(八百長:승부조작)의 늪으로 걷잡을 수 없이 추락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