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엽] '내가 선택한 길…비난 달게 받겠다'
기사입력 2000년 01월 28일 01시 43분
한국프로야구 최고의 홈런타자인 삼성 이승엽. 그는 지금 스물네살의 어린 나이로는 감당하기 힘든 시련을 겪고 있다.
`변절자' `배신자' 등 PC통신에서 쏟아지는 비난을 한몸으로 감수할 수 밖에 없다.
한국프로야구선수협의회(이하 선수협)에 가입하지 않은 댓가이리라. 하지만 여론의 집중공세를 받을만큼 이승엽이 선수협 파동의 모든 책임을 떠맡아야 되는지는 의문이다.
감정이 복받쳐 흐르는 눈물마저도 그는 감추려 했다. 이 또한 동정을 얻으려는 `수작' 쯤으로 여기는 팬들이 있을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선수협 파동이후 외부와의 접촉을 극도로 피해 온 이승엽을 27일 오후 경산볼파크에서 만났다.
－팬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고 있는데.
▲내가 선택한 일이기 때문에 모든 비난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몇몇 선후배들에게 꼭 선수협에 참여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지키지 못했다. 선수협 회원들이 욕을 해도 할 말이 없다. 약속을 어겼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선수협 참여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갑자기 태도를 바꾼 이유는.
▲지금도 선수협에 대해서는 찬성한다. 열악한 프로야구 현실에서 선수협은 꼭 필요하다. 하지만 희생이 너무 클 것 같다는 걱정이 들었다. 우리팀 동료들의 의견도 무시할 수 없었다. 미꾸라지 한마리가 물을 더럽힌다는 말처럼 내가 가입함으로써 동료들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생각을 바꿔 지금 선수회에 가입하면 팬들로부터 박수를 받을텐데.
▲욕심만 차린다면 지금 당장 서울로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우리팀 선수들이 한명도 참여하지 않았는데 혼자 어떻게 참여할 수 있겠는가.
－선수회 가입은 개인의 의지가 중요한 것이 아닌가. 소신이 없다는 말로 들리는데.
▲선수회에 가입한 죄로 자유계약선수(FA)가 될 경우 1년 정도 쉰다는 각오였다. 나는 주전이든 후보든 외국에서 뛸 수도 있다. 하지만 연봉이 적은 선수나 2군 선수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지난 24일 기자회견을 하게된 이유는.
▲선수회와 관련된 보도가 나가면서 PC통신에서 나의 가입여부를 묻는 글이 많이 올라왔다. 입장을 밝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결과적으로 기자회견 이후 비난이 거세졌다.
－구단에서 기자회견을 강요했다는 소문이 있는데.
▲결코 그런 일은 없었다. 내가 직접 요청을 했다. 내 입장을 밝힐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나만 생각했다면 지난 26일 1차로 떠난 전지훈련에 합류했을 것이다. 어려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전지훈련을 떠나는 것 같아 31일 본대와 함께 가기로 했다.
－선수회가 추진된다는 얘기를 들은 것은.
▲지난해 11월 한-일 수퍼게임 때 들었다. 무조건 참가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나이도 어리고 팀내에서도 중간층에 있기 때문에 선배들의 의견에 따라갔을 뿐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지난 21일 선수회 창립식장에는 왜 갔나.
▲선수회에 찬성을 했기 때문이고 정말 가입을 하려고 했다.
－창립회 도중 동료들보다 늦게 자리를 떠났는데.
▲팬들이 보고 있어 나가지 못했다. (김)기태형이 나가자고 했을 때 금방 일어났어야 했는데. 기태형에게 미안했다.
－지난 23일 저녁까지도 선수회에 가입할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았는데.
▲기태형으로부터 그간의 과정을 듣고 마음을 고쳐 먹었다. 취지는 좋지만 선수들의 순수한 마음으로 결성되지 않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진스런 구석이 있었다.
－후회는 하지 않는지.
▲내가 선택한 일인데 어찌하겠나. 먼 훗날 내 자식들에게도 설명을 해 줄 것이다. 야구는 팀 운동이고 동료를 감싸야 될 때는 그렇게 해야 된다고 말할 것이다. 내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으면 만족하겠다.
－정신적인 충격이 커 올시즌이 상당히 힘들텐데.
▲기자회견 때 팬들이 나를 원하지 않으면 야구를 그만두겠다는 말을 했다. 원정경기 첫 타석에서 팬들이 나에게 병을 던지고 야유를 한다면 `내가 이런 선수 밖에 안되나'하는 자책감이 들어 야구를 못할 것 같다.
－비난 여론에 대해서는.
▲혼자 눈물도 많이 흘렸다. 이 말이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해 일부러 지어낸 것이라고 오해할지 모르지만 내 나이로 감당하기는 힘든 선택이었고, 너무 괴롭다. 요즘에는 컴퓨터 근처에도 안간다. 인생살이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운동도 안될텐데.
▲몇일 후면 해외전지훈련을 떠나는데 운동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야구가 없는 곳으로 떠나고 싶은 마음 뿐이다.
－선수회가 합법화되면 가입할 것인가.
▲그렇다 하더라도 선배들과 의논하겠다. 팀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선수회에 하고 싶은 말은.
▲너무 죄송스러워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선수회가 정말 잘 됐으면 좋겠다. 마음은 항상 그쪽에 있다. 선수회 파문이 빨리 가라앉아 예전처럼 웃는 얼굴로 그라운드에서 선수들을 만나고 싶다. 성적은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다.
－팬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비난을 해도 달게 받겠다. 하지만 가족들에게는 전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늘(27일) 아버지가 병원에 가셨는데 혈압이 170∼120으로 높게 나왔다. 나 때문에 고생하시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
[대구＝권정식 기자 jskwon＠sports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