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칼럼] 하일성의 세상만사 '아빠의 눈물 누가 알까'
기사입력 2000년 01월 27일 14시 17분
나이가 들면서 여러가지 생활패턴도 바뀌는것 같다. 물론 그 많던 머리숱이 빠져 듬성듬성 허연 머리를 볼때마다 `세월은 어쩔수가 없구나'하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젊었을땐 관심이 없던 드라마가 나이를 먹으니 왜그리 재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요즘 또하나 변한 사실은 술자리에서 흔히 나오는 대화가 역시 자식들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는 것이다. 나와 친분이 돈독한 박교수는 딸만 셋이 있는데 나만 만나면 딸자랑을 하느라 정신이 없다.
"하형! 열아들 안부럽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퇴근하고 들어갈때 착 안기는 맛은 딸없는 사람은 말로해서는 모릅니다. 하형도 느꼈겠지만 아들있는 집 가보슈. 아버지가 들어오면 `다녀오셨어요'하고 삐쭉 얼굴만 내밀고 자기 방으로 쑥 들어간다고 합니다. 무슨 재미로 살겠습니까!"
보통 이런 얘기로 시작되는 박교수의 이야기는 술자리가 끝날때까지 딸 찬양으로 이어진다. 박교수는 나보다 세살위인데도 친구처럼 지내는 막역한 사이다. 가깝다보니 술자리에서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그날의 주제로 등장한다. 야구얘기는 물론 마누라 이야기, 어느 술집이 부대찌개를 잘 한다는 이야기, 월급에서 마누라 몰래 비자금으로 떼어논 이야기, 정치 이야기 등등…. 하지만 어느새 딸 이야기로 빠지는 것이 박교수의 특기인지라 나는 박교수하면 딸자랑, 딸자랑하면 박교수로 여기게 되었다.
그런 박교수가 드디어 큰 딸을 시집보내게 되었다. 사윗감은 모 대기업에서 촉망받는 사람으로 대학시절부터 연애한 사이라고 했다. 내가 식장에 도착했을 때 신부석에서 손님을 맞고 있던 박교수는 마치 자기가 결혼이라도 하듯 들떠 있었다.
"섭섭하죠. 하하하 축하합니다. 그렇게 애지중지 하시더니…."
악수를 하며 내가 말했다. 그러나 내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박교수가 말했다.
"하형 그건 참 모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효도관광도 딸두면 비행기 타고, 아들두면 기차 탄답니다. 요즈음은 며느리보다 사위가 더 잘한다는 말도 있죠."
그말을 듣고 `역시 박교수다운 생각'이라고 감탄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저녁 박교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당장 만나서 술이라도 한잔 하자는 거였다. 부랴부랴 약속장소에 도착해보니 박교수는 벌써 소주 한 병을 비우고 홀로 취해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나를 향해 물었다.
"하형도 딸만 둘이죠? 하형, 괴롭습니다."
"무슨 말씀하시는 겁니까. 딸 떠나 보낸 것 때문인가요. 아니 사윗감도 좋아보이고 사돈댁도 뼈대 있는 집안 같던데."
"그게 아니라…. 옛말이 하나 그른 것 없습니다. 출가외인이라고…. 아 글쎄 서운해서 누구에게도 이야길 못했는데 신혼여행 떠나면서 딸이 내게 했던 선물을 도로 달라는 겁니다. 여행갔다와서 찾아가겠다구요."
"선물이라뇨?"
"얼마전 생일날 지갑과 혁대가 세트로 된 것을 선물받았는데 있는 것도 많아서 쓰지 않고 내버려 두었더니 안쓰려면 자기에게 주면 어떻겠느냐는 거에요. 자기 신랑주겠다는거죠…."
"따님이 별 뜻없이 이야기 했겠죠. 너무 서운하게 생각지 마세요."
"하형도 알다시피 NO스트라이크 THREE볼(아들없고 딸셋)인 내가 젊었을 때 부모님과 주위의 어른들로부터 얼마나 걱정을 들었겠습니까. 요즈음에도 딸 여럿 낳고 아들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데, 그 당시에는 더했죠. 그래도 딸들 기 죽을까봐 얼마나 노력했는데…. 남편밥은 누워서 먹고 아들밥은 앉아서 먹고 딸밥을 서서 먹는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술잔을 들이키는 박교수의 눈가가 붉어져 갔다. 나 또한 남의 일 같지않아 연방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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