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남자] 음모 (29)

기사입력 2000년 01월 24일 13시 18분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오후 2시쯤에 이대진은 회사로 찾아온 김재선과 지하층의 커피숍에서 마주앉았다. 커피를 주문한 김재선이 정색한 얼굴로 이대진을 보았다.

"김경희가 오전 11시에 서울을 떠났습니다. 후임자는 조철이란 사내인데 어제 도착했습니다."

이대진의 표정을 본 그가 입술 끝을 조금 올리며 웃었다.

"알고 계셨군요?"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사흘 전 밤에 같이 계셨는데. 그때 언질을 주던가요?"

"곧 돌아간다고 하더군요."

"김경희는 숙청당한 것 같습니다."

퍼뜩 시선을 든 이대진을 보자 김재선이 의자에 등을 붙이더니 담배를 꺼내물었다.

"김경희가 그런 눈치를 보이지 않던가요?"

"전혀."

"출국할 때 세명의 보호를 받고 갔습니다. 그리고."

김재선이 힐끗 이대진을 보았다.

"어젯밤에 호텔 안에서 소동이 있었습니다. 김경희는 오늘 새벽까지 북한에서 파견된 자들한테서 심문을 받았습니다."

"그 여자가 왜?"

얼굴이 굳어진 이대진이 묻자 김재선은 담배 연기를 길게 뿜었다.

"과업에 대한 정보를 외부에 누출시켰다는 혐의를 받고 있더군요."

"…."

"북한측은 이과장님의 북한측에 대한 요구를 김경희의 책임으로 돌리려는 것 같습니다. 일본은행의 보증서를 주겠다는 약속은 북한측이 예상하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정색한 김재선이 한숨과 함께 연기를 뱉었다.

"강철민이 희생양으로 김경희를 찍은 것 같습니다. 그럴만한 정황 증거는 충분합니다."

"더러운 음모입니다."

이대진이 잇사이로 말했다.

"김경희는 끝까지 제 조국을 배신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래서 자진해서 떠나겠다고 했습니다."

"김경희쯤 되는 여자면 분위기를 눈치채고 있었을 텐데요."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인 김재선이 정색했다.

"이미 끝난 일이지만 그날밤에 다른 말은 없었습니까?"

"내가 귀순을 권유했지만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그리고는 남아서 지켜보겠다고 하더군요."

두 눈을 치켜뜬 이대진이 앞쪽의 벽을 노려보았다.

"본래 이 사업은 한국을 철저히 이용하려는 해외사업단의 공작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랬다가 부작용이 일어났다고…."

목소리를 낮춘 이대진의 시선이 힘없이 탁자 위로 떨어졌다. 김재선의 말대로 김경희가 자신의 주변에 닥쳐온 분위기를 느끼고 있었던 것 같이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김경희는 그것을 알면서도 귀순을 거부했단 말인가?

그날밤 김경희가 뱉었던 말들이 조각으로 떼어져 귓속에 울렸고 얼굴 표정과 몸이 눈 앞에 가득 펼쳐졌다. 그때 김재선이 말했다.

"북한측도 우리가 호텔방에 감시 장치를 해놓은 것을 모를리가 없습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김경희를 심문한 의도를 우리는 연구하고 있지요."

"…."

"역공작의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만 하시지요."

시선을 든 이대진이 김재선을 노려보았다.

"나는 더이상 이런 음모에 말려들지 않을 겁니다."

어쨌든 김경희는 떠난 것이다. 이대진은 한 여자로서의 김경희만 간직하고 싶었다. 음모를 떠나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