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남자] 음모 (26)

기사입력 2000년 01월 20일 14시 12분


인사동의 한정식집에서 식사를 마친 그들은 파전과 족발을 안주로 더 시키고는 소주를 마셨다. 식당 안은 손님들로 가득 차 있어서 활기띤 분위기였다. 소주를 세병째 시켰을 때 김경희가 불쑥 말했다.

"내가 상대했던 남한 사람들 대부분이 부정적이었던 건 사실이야."

김경희가 웃음띤 얼굴로 이대진의 잔에 술을 채웠다.

"하지만 이대진씨를 겪고나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지. 남한 사람들의 저력을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이거 얼굴이 근질근질하군 그래."

술을 한모금에 삼킨 이대진이 웃었다.

"나를 경멸대상 제1호로 올려놓고 있는 줄 알았거든."

"내 뒷조사를 하고 있는 줄 알고 있어."

술잔을 든 김경희가 따라 웃었다.

"대충은 파악이 되었겠지? 내가 쓰는 자금의 출처까지도 말이야."

"뒤에도 눈이 달린 모양인데."

"기껏 조사까지 다 해놓았는데 어떡하지? 내가 서울을 떠나게 되어서 말이야."

김경희가 정색한 이대진을 바라보며 다시 웃었다.

"난 사흘 후에 베이징으로 떠나."

"유감인데."

"그래서 한잔하자고 한 거야."

한모금 소주를 삼킨 김경희가 시선을 내렸다.

"사업은 성공적이었지만 이대진을 포섭하는 것에는 실패했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어떻게든 거기를 함락시키려고 했으니까."

이대진이 김경희의 잔에 술을 채웠다.

"우린 서로 선입견을 갖고 경멸하고 있었어. 그러니 제대로 일이 될리가 없었지."

"우리는 거대한 음모 속에 끼어든 부속품일 뿐이야."

김경희가 반짝이는 눈으로 이대진을 보았다.

"이렇게 우리 둘이 마주앉아 있으면 연인 사이처럼 보일까?"

"북한 공작원과 남한 상사원으로는 생각하지 않을 거야. 아마 만난지 얼마 안되는 남녀 사이쯤으로 보이겠지."

이대진은 김경희의 정색한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술기운으로 눈 둘레가 조금 붉어졌을 뿐 김경희의 얼굴은 멀쩡했다.

"내가 뒷조사를 했기 때문에 떠나게 된 것은 아니겠지?"

그가 불쑥 묻자 김경희는 머리를 저었다.

"내가 교체해달라고 요구했어. 더 오래 있다가는 내가 흔들릴 것 같아서."

이대진은 김경희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었다. 김경희에게서 이런 말을 들을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나는 남한 사회를 경멸하면서도 조금씩 동화되어가는 나를 발견했어. 그리고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어."

"이봐, 말 조심해. 누가 듣고 있을 수도 있어."

이대진이 낮게 말하자 김경희가 풀썩 웃었다.

"나는 공작원으로만 5년을 보냈어. 걱정하지마."

"내가 도와줄 일이라도 있어?"

"술마셔. 그리고 어디 분위기 좋은 곳으로 가자."

다시 술병을 든 김경희가 이대진의 잔에 술을 따랐다.

"국정원 요원 둘이서 골목 밖에 있을 거야. 차는 검정색 소나타고. 우선 그 친구들을 떼어놓자구."

"그리고는?"

"그리고는 둘이서 시간을 보내는 거지. 아마 우릴 찾다가 지쳐서 모두 같은 상상을 하겠지. 안그래?"

이대진의 시선을 잡은 김경희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떠나기 전에 내가 그쪽 목적을 이루도록 해줄게. 물론 분위기는 조금 다르겠지만 말이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