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가 이러쿵 저러쿵] 도박판 트레이닝복 해프닝
기사입력 2000년 01월 20일 14시 12분
80년대에 발표된 윤흥길의 `완장'이란 소설이 있다. 한 농촌의 저수지를 배경으로 `완장'을 찬 주인공이 권력에 마취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아무것도 아닌 `완장'을 무섭게 여긴다.
벗겨놓으면 아무 것도 아닌데 제복 역시 `완장'이나 비슷한 역할을 한다. 이것은 `5공 시절' 실제로 충무로에 있었던 일인데, 트레이닝복 한 벌이 사람을 구한 적이 있다.
서슬시퍼런 시절이었고 더군다나 한겨울이었기 때문에 영화계 역시 할 일이 별로 없었다.
한겨울 영화계 사람들이 충무로의 한 여관방을 얻어 화투를 치고 있었다.
판돈이라고 해봤자,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점당 10원에 불과했다. 요즘 같으면 경찰견(?)도 보지 않고 지나갈 놀이에 불과한 화투판이었지만 시대가 시대였고 여관에 들어가서 판을 벌였기 때문에 `도박'이라고 하면 `도박'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화투를 치면서 술을 마셨는데, 원래 화투판에서 술이 있으면 손보다는 입(?)으로 치기 마련이었다. 결국 10원짜리 고스톱 판을 도박판으로 오해한 시민 한 명이 투철한 신고정신을 자랑했는데 곧바로 경찰관이 여관방을 급습했다고 한다.
"화투장 내려놓고 벽에 손 올려！"라는 불호령에 10원 짜리 도박꾼(?)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막상 신고를 받고 들이닥쳤지만 방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소주병과 범법자들의 행색을 살핀 경찰관도 조금은 수상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신고를 받고 출동한 만큼 단속은 해야만 했다.
이들의 행색을 살펴보면 목에 때가 낀 와이셔츠를 입은 사람은 그나마 신사였고, 고동색 군용 내의를 입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또 조금 눈에 띠는 청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경찰관이 "아저씨 앞쪽으로 돌아서봐"라고 하자, "이제 나 죽었다"며 뒤돌아선 트레이닝복 차림의 도박꾼. 경찰관의 눈이 트레이닝복 상의 왼쪽에 눈이 갔다. 경찰관의 시선에 따라 사람들의 모든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과연 그곳엔 뭐가 있었을까? 바로 마름모꼴의 마크가 있었는데 바로 `민정당' 마크였다. 통장인 아버지의 트레이닝복을 내복삼아 입고 나왔던 것이다.
경찰관이 "아저씨, 민정당 당원이세요"라고 하자,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네"라고 했는데, 경찰관은 "아이고, 죄송합니다. 당원인줄 몰라 뵙고…"라며 사과를 하며 여관방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고 한다. 영화판에서 벌어진 정말 영화 같은 이야기다. 그런데 그땐 그랬다. 트레이닝복 한 벌이 최고의 권력을 누린 때도 있었다.
글:이문성[영화기획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