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칼럼] 강우석 레디고 '감독으로 돌아가기에 앞서'
기사입력 2000년 01월 17일 13시 57분
근년들어 제작자 내지 배급업자로 통했던 나는 요즘 2년만에 감독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레고 있다.
감독의 자리를 비운 지 2년밖에 안됐는 데도 불구하고, 어느덧 나이에 걸맞지 않게 `전직 감독' 내지는 `원로 감독', 심지어 `한때 감독'으로 취급당하는 나를 보고 황당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별로 나이 차이도 나지 않는 후배감독들도 나를 `선배감독'으로 대우하기 보다는 `영화를 찍게 해주는 제작자'로 보는 게 확연했고, 안면 있는 사람들은 "좋은 영화 만드셨네요"란 말보다 "장사 잘 된다면서요"란 말을 하면서 나를 사업가로 분류했다.
내가 제작한 영화가 흥행이 잘 될 때 "한 건 하셨네요"란 인사를 받으면, 나는 미소 가득한 얼굴로 접대를 하곤 했지만, 한편으론 속이 뒤집어졌다.
하긴 남의 탓만 할 것도 아니다. 나도 모르는 새에 사장티를 낸 적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감독이란 자부심 하나로 호의호식하지 않아도 좋았고, 좋은 집에 살려고도 안했던 내가 나도 모르는 새에 언제부터인가 편안함을 찾아다니게 된 것은 아닌지…중형차보다는 대형차를 타는 승차감에 만족해하는 나를 보고 스스로 놀란 적도 있다.
최근 내가 새작품을 연출한다는 소식이 매스컴을 통해 알려졌지만, 나는 평소와 별다를 게 없는 전화를 많이 받았다. "지금 잘 나가는데, 왜 감독을 할려고 합니까?" "혼자 다 할려고 하는 게 지나친 욕심 아닐까요?" 등등.
좋게 해석하면, 지금 하고 있는 일만 해도 너무 바쁜 사람이 연출까지 한다는 게 가능하겠느냐는 말들이었다.
실제로 내가 준비하고 있는 `신라의 달밤'에 출연하기로 한 박중훈과 이성재도 그랬다.
박중훈은 그동안 내가 감독으로 복귀하는 것은 시간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지, 사석에서 "형이 하면 내가 노개런티로 출연할 게"란 공약을 남발했고, 이성재도 "감독님이 하면 저도 출연료 안받을게요"라는 실언을 했던 것이다.
최근 내 마음에 쏙 드는 시나리오가 `하늘에서 떨어지듯' 내손에 들어왔고,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두 배우에게 출연을 제의했다. `하늘에 별따기' 만큼 이나 캐스팅하기 힘들다는 박중훈은 7분만에, 이성재는 5분만에 계약서를 썼다. 왜냐하면 뱉은 말이 있기 때문에.
(박중훈과 이성재 이외에 한 톱클래스 여배우도 노개런티 출연 약속을 했는데, 웬지 그녀는 요즘 전화를 받지않고 있다.)
물론 두 배우 모두 노개런티 계약은 아니었다. 박중훈은 받을 거 다 받아갔고, 이성재는 한술 더떠 개런티를 올려서 받았다.
그래도 나는 기분이 좋았다. 이들이 나를 감독으로 생각해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번 영화를 시작하면서, `잘못하면 은퇴작품이 될 지도 모른다'는 비장한 각오까지 다지고 있다. `이 정도 만들려고 그렇게 잘난 척 했나' 내지 `영화감독이란 소리를 듣고 싶어 한편 더 찍었나보네'란 비아냥은 듣지 말아야 할텐데….
나는 빚까지 지면서 이 영화가 망하면 나도 망한다는 생각으로 `투캅스'를 찍었던 시절, `달콤한 신부들'로 데뷔했지만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았던 88년의 고독한 시절을 생각하며 이번 영화를 찍으려고 한다.
[P.S] 감독할 준비를 하다가, 갑자기 떠오른게 바로 이 칼럼이었다. 평소에도 간신히 마감시간에 맞춰 팩스를 보내곤 했는데, 감독까지 하면서 칼럼을 쓸 생각을 하니 걱정부터 앞선다. 하지만 담당기자의 압력과 매주 칼럼이 나올 때 정성스럽게 스크랩을 하는 아내, "잘 읽었다"는 격려를 해주던 독자를 생각하며 촬영장에서도 칼럼을 계속 쓰겠다.
[영화감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