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리포트] 유재순의 일본통신 - 심심해서 어떡해
기사입력 2000년 01월 11일 14시 58분
"유상, 심심해서 어떡해요?"
2주동안의 서울방문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온 나에게 산케이 신문기자가 뜬금없이 불쑥 내뱉은 말이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심심하긴 뭐가 심심해? 밀린 공부와 일하기도 바쁜데"라고 대꾸하자 그가 다시 말했다.
"에이, 한국사람답지 않네. 우리 일본인들도 같은 생각인데."
그제서야 나는 그가 무슨말을 하고 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서울에 가기 전, 12월 한달간은 정말이지 노이로제에 걸릴만큼 온통 Y2K라는 문제 속에 살았었다. 준비성이 많은 일본인이라는 것은 일찍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토록 장기간동안 홍보하고, 계몽하고, 일일이 준비물을 챙기라고 장려할 줄은 정말이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니, 그런 경험이 단 한번도 없었던 한국인으로서는 솔직하게 표현하면 나중에는 짜증스럽기까지 했다.
TV를 켜도 Y2K, 신문을 봐도 Y2K, 거리를 나가도 상점마다 Y2K 비상식료품으로 떠들썩했다. 꼭 Y2K중독증에 걸린 사람들 같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 생활하다 서울에 가니 웬걸, 서울은 너무도 초연했다. 잔고증명서를 떼기 위해 길게 줄을 선 일본은행과는 달리 한국의 은행들은 평상시와 똑같았고, 일반시민들의 입에서는 Y2K의 Y자도 나오지 않았다. 다만 연말쯤에서야 신문과 TV방송에서 비상식료품을 준비해야 한다고 홍보했을 뿐이었다.
결국 가는해 1999년과 오는해 2000년 사이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직 속단하기에는 이르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별일 없는 걸 보면 안심해도 될 것 같다. 하지만 문제는 한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에 있었다. 일본인들은 지난 연말연시 일주일이라는 긴 연휴를 모든 스케줄을 취소한 채 조용히 보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예비훈련까지 한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산케이 신문기자의 말대로 "심심해서 어떡해?"라는 말이 나올 법도 했다. 나는 이 말이 맨처음에는 산케이 신문기자가 그냥 개인적으로 만들어 낸 것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만나는 일본인마다 지나가는 말로 "심심해서 어떡해?"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이 말이 단순한 인사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일본인 특유의 응용적인 어법, 자신들의 의사가 완곡하게 깃들어 있는 간접화법이라는 것을 안 것이다.
결국 이 말 속에는 은근히 일본정부에 대한 힐난이 담겨 있었다. `그토록 요란스럽게 설쳐대더니 결국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잖느냐?'라는 것이 이 말 속에 내표된 의미였다.
이같은 국민들의 마음을 읽었는지 오부치 수상이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우리 일본은 지진 등 여러 유사시를 대비해서 비상사태에 대한 훈련이 필요하다. 하지만 최근 국민들이 조금은 안이하고 느슨해진 감이 있어 철두철미한 대비를 하려고 했다. 그래서 진짜 비상사태라고 생각하고 정부차원에서 그런 홍보를 한 것이다."
이 말에 대해 반론을 제기할 일본인들은 아무도 없다. 심정적으로는 오히려 그런 오부치내각에 대해 찬사를 보내는 국민들이 더 많다. 하지만 현실적인 자기문제로 되돌아오면 괜히 억울하고 안타까운 느낌은 영 지울길이 없는 모양이다. 정부의 홍보에 따라 열심히 대비하느라고 제대로 즐기지도 못하고 날아가버린 금쪽같은 연휴, 그래서 일본인들 사이에서 "심심해서 어떡해?"가 인사말이 돼버린 것이다. 즉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안심했다는 의미가 반, 한편으로는 진짜 허탈했다라는 의미가 반 정도 들어있는 말이었다.
특히 나에게 던진 이 말은, 작년 일본인이 하는 그대로 따라하면서 투덜댔던 내말에 대한 반응을 떠보기 위한 의도도 다분히 숨겨져 있었다. "이렇게 요란스럽게 준비했다가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진짜 억울해서 어떡해?"라고 묻는 그들에게 나는 솔직하게 말했었다.
"좀 심심하긴한데 역시 미리 준비하는 훈련은 필요해, 특히 툭하면 대형사고가 터지고 남북이 대치된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아무튼 10일 성인의 날 공휴일을 맞아 일본인들은 제대로 즐기지 못한 연말연시의 한을 풀기라도 하듯 일제히 나리타공항을 빠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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