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남자] 음모 (14)

기사입력 2000년 01월 06일 14시 53분


그날 저녁 7시 정각에 이대진은 반도호텔 김경희의 방으로 들어섰다. 김경희가 방에서 만나자고 했기 때문이다.

"이젠 방에서 만나도 부담은 없지?"

김경희는 실크 원피스 차림이었는데 몸의 윤곽이 그대로 드러났다. 웃음띤 얼굴로 김경희가 이대진의 앞쪽 소파에 앉았다.

"뭘 그렇게 봐?"

정현희의 말을 떠올린 이대진은 김경희의 옷을 살펴보는 중이었다. 여자 옷값은 알수 없었지만 고가로 보였다. 시선을 든 이대진이 따라 웃었다.

"섹시하군. 그래."

"남쪽에서는 그 말이 칭찬이라지? 기분좋게 받아들일게."

탁자 건너편에 앉아 있었지만 김경희에게서 옅은 향수 냄새가 맡아졌다. 그리고 입술에도 살색의 루즈가 칠해져 있다. 김경희가 이대진의 시선을 받고는 웃었다.

"무슨 일이야? 날 보자고 한건."

"내일 대남담당 비서가 온다면서?"

선선이 머리를 끄덕인 김경희는 아직도 웃음띤 얼굴이다.

"그래. 그런데 왜?"

"내가 그분을 만나야겠어."

"용건은 뭔데?"

"사업에 대한 책임자의 확실한 보장을 받아야겠어. 잘못되면 나는 사기꾼에다 희생양이 될 수가 있으니까."

"남북교류사업단장 박동기씨가 만나기로 했는데."

"그 사람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문제가 일어나면 책임을 질 위치가 아냐. 나하고 수출업체가 당사자란 말이야."

김경희의 얼굴이 차츰 굳어지더니 자리를 고쳐 앉았다.

"이대진씨는 지금 뒤에서 조종을 받고 있구만. 그렇지?"

"한국에서는 뒤에서 누가 조종한다고 따라하지 않는다. 특히 나 같은 경우에는 더욱."

소파에 등을 붙인 이대진이 담배를 빼어 물었다.

"만나도록 주선해 줘. 그것이 결국 이 사업을 위한 길이 될테니까."

"좋아. 주선하지."

정색한 김경희가 머리를 끄덕였다.

"비공식이야. 그리고 나까지 넷이 만나는 거야."

"그럼 이젠 술이나 한잔하지."

시선을 부드럽게한 이대진이 김경희의 젖가슴께를 바라보았다.

"옷이 멋있는데. 백화점에서 산 거야?"

"내가 가져왔어. 그런데 그건 왜 물어?"

"실크 아냐? 꽤 비싸겠지?"

그러자 김경희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한국돈으로 몇백만원 할거야."

"북한에서도 주식투자를 하나? 아니면 부동산 투기라든가."

"난 너처럼 사기나 횡령은 하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선 김경희가 선반에 놓인 위스키병을 집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냉장고의 얼음을 꺼내면서 그녀가 말을 이었다.

"너처럼 타락한 인종이 아니란 말이야. 알아 듣겠어?"

얼음통을 들고 돌아선 김경희는 웃는 얼굴이었다. 자리로 돌아온 김경희가 잔에 시바스리갈을 따랐다.

"두고 봐. 10년 안에 북조선은 한국을 따라잡을 테니까."

"언제는 15년이라고 하더니 며칠 사이에 5년이 빨라졌군. 이번에는 만리마 운동을 하는 모양이네."

한모금에 술을 삼킨 이대진이 웃었다.

"한국의 저력을 얕보지 마라. 너희들은 비실대는 놈들만 상대해왔어."

"그것이 너희들의 불행이야."

이대진의 빈잔에 술을 채우면서 김경희가 부드럽게 말했다.

"네가 그 비실대는 자들의 입김 한번에 날아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