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칼럼] 강우석의 레디고－암표상은 흥행 감별사
기사입력 2000년 01월 03일 15시 43분
흥행될 영화가 개봉될 때 빠지지않고 극장 앞에 나타나는 비영화인 전문가들이 있다.
체육인이 아니면서 스포츠 빅게임이 열릴 때마다 예외없이 경기장 앞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도 있다.
바로 암표상들이다.
영화전문가들도 맞히기 힘들다는 흥행 결과를 어떻게 이들이 개봉 첫날부터 알아채고, 극장 앞에 나오는 것인지 나로선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90년대 초반, 내가 만든 영화의 개봉전 시사회가 열렸던 K극장에서 겪은 일이다. 영화관계자 시사회였던 만큼 참석자들은 영화사 직원, 평론가와 기자 등 대부분 구면이었다.
영화가 절반쯤 상영되고 있을 즈음, 나는 초조한 마음에 극장 로비로 나갔는데 장내 뒤쪽에서 몇명의 낯선 사람들을 발견했다. 이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좌석에 앉아 있지도 않고, 선 채로 영화를 보고 있었다.
엔딩 타이틀이 올라가고, 장내에 불이 켜지는 순간, 이들은 제일 먼저 장내에서 빠져 나갔다. 분명 영화관계자가 아니었고, 출연자들의 부모도 아니었다.
마치 방금 계모임을 끝낸 중년 아주머니같은 분들이 10명 정도 됐고, 건장한 체격의 아저씨가 두명 있었다.
이들은 로비의 매점 한 귀퉁이로 몰려갔다. 나는 슬쩍 이들을 따라가, 딴척을 하면서 대화내용을 엿들었다.
이들은 만면에 미소를 가득 머금고,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거 대박인데!" "2회부터 매진 떨어지겠어." "마지막회도 문제 없겠는걸."
나는 누구인지도 모르는 이들의 영화분석에 내심 흐뭇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들이 제정신인가' 싶었다. 아무도 모른다는 영화흥행을 이미 모든게 결정됐다는 듯이 품평회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다시 개봉을 걱정하면서 극장을 나가는데, 40대 초반의 한 사내가 내게 다가와 꾸벅 절을 했다.
그는 마치 영화인처럼 "감독님, 축하합니다"라고 말하더니, "내일 낮 한시쯤부터 난리가 날 겁니다"라며 악수까지 청하곤 유유히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날. 상황은 그의 예견대로 펼쳐졌다. 오후 1시 2회부터 매진이 시작되더니, 오후 3시 30분쯤에 마지막회까지 매진됐다.
나는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나는 점심때쯤 그 극장 앞을 다시 찾았는데, 개봉날에 비해 다소 썰렁한 느낌을 받았다.
그때 그 사내가 또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오늘은 오후 3시부터 입니다."
그의 예상은 또다시 적중했다. 오후 3시가 되니까 정말 손님들이 몰려오는게 아닌가.
손님이 현격하게 줄어든 2주후. 나는 극장 앞에서 그 사내와 시사회에서 본 아주머니들을 만날 수 없었다.
대신 그들의 일부가 길 건너편 극장 앞에서 왔다갔다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이후에도 종종 그들과 마주쳤는데, 한 아주머니는 내 앞에 불쑥 나타나, 내가 만든 영화도 아닌데 손님이 잘 안드는 지 "영화 좀 잘 만들라고 해요"라고 야단을 치고는 홀연히 사라지곤 했다.
한맥영화의 김형준 사장은 자신이 만든 영화가 개봉하는 날 극장 앞에 손님이 별로 없어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자, 낯선 사람이 소주 한잔을 사주더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낯선 이는 "사장님이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를 개봉시켰을 때 돈 벌어서 집을 샀다"면서 "사장님 같은 분이 잘되셔야되는데…"라고 위로를 해주더란다.
극장 앞 풍경을 스케치하다보면 비단 암표상 뿐만 아니라 또다른 흥행사들을 그릴 수 있다.
극장 앞 노점상에 오징어가 많이 쌓여 있는 날은, 영화가 잘 되는 날이다. 노점상들은 이미 흥행결과를 예측하고,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를 잘 만드는 사람, 스포츠의 명선수는 적지만, 영화를 판단하고, 스포츠경기를 평가하는 사람들은 수없이 많다.
그들은 어찌보면 비전문가들이지만, 전문가라고 자부하는 사람들보다도 더 정확하게 작품과 경기를 분석해내곤 한다.
그것은 영화를 보러 오는 사람들, 스포츠 경기를 보러 오는 사람들의 안목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들이 왜 돈 내고, 시간을 내서 영화를 보고, 경기를 보러 오겠는가.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바로 이들을 상대로 게임을 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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