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리철진] 이데올로기 넘어선 '휴먼 코미디'
기사입력 1999년 05월 12일 15시 20분
`김신조'로 대변되던 무장간첩. 매년 6월이면 `상기하자 6.25 쳐부수자 공산당'이란 표어로 강조되던 반공정신.
간첩신고는 113. 반공이데올로기가 극에 달했던 70년대에는 개그맨 고영수가 `새드 무비'란 팝송을 `간첩신고는 113'으로 개사해 불러 큰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
이른 아침 산에서 양복입고 내려오는 자, 광화문 문 앞에서 시청앞을 묻는 자… 워워워 간첩신고는, 국없이 일일삼….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젊은 세대는 간첩이나 공산당이 `빨간 색'이었던 걸 모른다. 아니 별 관심도 없다.
신고와 현상금을 떠올리던 시절이 지난 탓이다. 허구헌날 방구석에 틀어박혀 법전을 파고들던 고시준비생이 간첩으로 오인돼 곤욕을 치르던 `호랑이 담배먹던 시절'은 분명 지났다.
이제 간첩은 분단이데올로기의 부산물로 남은 관심 밖의 인물일 뿐이다.
장진 감독은 바로 여기에 포커스를 맞췄다. 북한의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슈퍼돼지 유전자 샘플을 훔치러 온 간첩, 리철진.
그러나 남파간첩의 목표를 요인 암살 등 26가지로 분석해내는 정보요원들의 진지한 표정. 장 감독은 이들의 상반된 관계를 위트와 유머로 풍자한다.
리철진은 남파되자마자 어리숙한 4인조 택시강도에게 당한다. 특수훈련을 받은 리철진은 모든 걸 빼앗긴 채, 한심한 처지가 되어 고정간첩과 접선한다.
고정간첩 30년 생활의 오선생(박인환)은 또 어떤가. "이 나라는 하나 좋은 게 있지. 쓰면 없어진다는 것. 이념도 투쟁열의도."
아들(신하균)과 딸(박진희)도 모두 아버지가 간첩인 걸 안다. 그러나 이들에겐 아무런 이념이 없다. 그저 남들과 똑같이 남한에서 살아갈 뿐이다.
리철진은 박인환의 집에서 일주일간 머물면서 딸의 따뜻한 배려로 조금씩 `사람다운 삶'에 눈을 뜬다. 이 6박7일 동안 리철진의 남조선 생활이 `휴먼코미디'를 태동시키는 배경이다.
리철진을 둘러싼 4인조 택시강도나 정보부요원들, 또는 북한공작원들도 조역에 머물지 않는다. 장 감독 특유의 `캐릭터 살리기'가 단연 돋보인다.
전작 `기막힌 사내들'에서 기발한 캐릭터들을 발굴해냈지만 이를 하나의 드라마로 꿰는데 실패해 아쉬움을 주었던 장 감독은 이번에 이를 완전히 만회했다. `간첩 리철진'의 캐릭터 하나하나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은 물론 세련된 `영화감각'을 한껏 과시했다.
특히 4인조 택시강도는 감초에 머물지 않고 영화전체에 힘을 불어넣는 `폭소탄' 구실을 톡톡히 한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 어렵게 임무를 완성하고 북으로 넘어가려던 리철진이 슈퍼돼지 유전자 샘플을 북한에 원조하기로 했다는 뉴스를 듣고 자살하는 모습에서는 가슴이 미어지기도 한다.
리철진을 북으로 보내기 직전 고정간첩 박인환이 무심코 던진 "너는 내가 공산주의자로 보이나?"가 비장하게 느껴지는 것도 웃음 뒤의 메시지가 강렬하기 때문이다.
장진이란 감독의 재발견.
[전문가 평점]
조희문(상명대 교수)_★★★1/2
박평식(영화평론가)_★★★★
[이창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