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칼럼]강우석'흥행실패 내 탓이오' 반성을
기사입력 1999년 05월 11일 14시 24분
"내게 그런 핑계 대지마, 입장 바꿔 생각을 해봐, 니가 지금 나라면 넌 웃을 수 있니…."
김건모의 `핑계'란 노래는 이렇게 시작한다.
사람들은 핑계를 대며 자신의 잘못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한다.
영화가 망해도 핑계는 많다.
93년 `투캅스'를 개봉하고 나서 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원망을 받았다.
`투캅스' 때문에 자기 영화가 망했다는 푸념들이었다.
작년에는 `타이타닉' 때문에, 올해는 `쉬리' 때문에 다른 영화가 망했다는 말은 정설처럼 되어 있다.
정말 `∼때문에' 그 영화들이 망한 걸까?
반대로 망한 영화들 때문에 그 영화가 잘됐다고 말할 수는 없는걸까?
과거 영화계에는 핑계거리가 더 많았다.
바로 검열과 소재제한이란 문제였다.
실제로 이유있는 핑계도 많았다.
소재 제한은 영화 제작환경을 위축시킨게 사실이고, 제작중단 사태를 야기하기도 했다.
한국영화인협회 김지미 이사장은 과거 임권택 감독의 `비구니'란 영화를 촬영하기 위해 삭발을 했지만 제작이 중단된 일이 있었다.
또 장선우 감독의 `붉은 방'은 `고문'이란 소재 때문에 제작을 할 수 없었고, 김수용 감독의 `도시로 간 처녀'는 버스 안내원의 항의로 만들 수 없었다.
이런 예를 들다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적어도 지금은 "왜 우리는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들지 못하는가"라는 비탄에 젖어 소주에 취할 일은 없기 때문이다.
일례로 개봉을 앞두고 있는 영화 `간첩 리철진'은 옛날 같으면 만들 생각도 못할 영화였다.
감히 제목에 `간첩'이란 단어가 들어간, 간첩이 주인공인 영화를 만들수 있었겠는가?
아직도 간첩을 소재로 한 코미디 영화를 만드는데 "혹시 간첩을 미화하지 않을까"하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감독이 공산주의자가 아닌 다음에야 그런 양식없는 짓을 할 리도 없는데다가, 만에 하나 그런 영화가 만들어졌다고 한들 관객들이 좋아할 리도 없을 것이다.
내가 알기로는 정보기관도 이 영화에 대해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세상이 변해도 정말 많이 변한 것이다.
이제 영화인들은 `소재제한 때문에'란 핑계를 댈 수 없게 됐다.
또 `검열 때문에'란 핑계도 댈 수 없다.
검열은 심의제도로 바뀌었고, 섹스나 폭력을 저질적으로 상품화한 영화가 아니라면 관객은 어떤 작품도 극장에서 볼 수 있게 됐다.
검열이 있을 때엔 "어떻게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는가"란 공격이 영화사에 쏟아졌지만, 심의로 바뀐 후엔 혹시 문제가 생겨도 "어떻게 이런 영화에 심의를 내 줄 수 있느냐"로 되면서 공진협이 영화사의 방패막이를 해주기도 한다.
한마디로 이젠 영화 만들기 좋은 시대가 된 것이다.
그래서 이젠 더이상의 핑계가 통하지 않는다.
영화가 안좋다면 그건 전적으로 영화를 만든 사람이 책임져야 한다.
욕도 당사자가 먹어야하고, 스스로 능력의 한계를 반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직도 핑계를 댈 게 있다면 오직 하나뿐이다.
남의 영화 때문도 아니고, 소재제한 때문도 아니고, 검열 때문도 아니고, 오직 자신 때문이라는 것이다. [영화 감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