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유치 막후비화] 개최지 조기결정론 반대
기사입력 1999년 05월 09일 15시 12분
나는 월드컵 개최지 조기 결정론을 주장하는 아벨란제회장에게 "세상의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다. 한－일간의 유치 경쟁에도 부정적인 면이 있는 반면, 긍정적인 면도 있다. 정당한 경쟁을 통해 월드컵을 제대로 치를 자격이 있는 나라를 선택하는 자체가 뉴스도 되고 축구붐을 조성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설득했다.
그리고 조기 결정은, 예를 들자면 축구경기를 하는데, 전반전을 보니까 어느 한팀이 일방적으로 우세하니, 후반전은 그만 두자는 것과 같다고 했다.
아벨란제 회장은 알겠다며 다른 안건으로 넘어갔다.
회의를 마치고 회의장 밖으로 나오자 로비에서 대기하고 있던 일본의 무라타와 교도통신 런던 주재 기자가 나를 보더니 조기 결정하기로 결정됐느냐고 물었다.
무라타나 교도통신기자가 집행위원도 아닌데 회의 의제를 어떻게 소상하게 알았는지 의아해 했었다.
이쯤에서 조기 결정론이 사그라드는가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7월말쯤 카리브해에 있는 케이만 군도에서 북중미카리브 축구연맹 주최 쉘컵대회가 열렸다. 나는 그 지역 사람들과 사귀고, 또 한국을 소개하기 위해 그곳에 날아갔다.
그런데 나의 숙소에 FIFA사무국으로부터 온 팩스가 전달되었다.
팩스는 5월말 취리히에서 열린 회의의 회의록이었는데, 그 회의록에는 개최지 조기 결정에 대해 참석자들이 찬성(agreed) 했다고 되어 있었다.
그리고는 회의록에 이의가 있으면 3일 안에 통고하라고 되어 있었다.
나는 즉각 FIFA본부에 편지를 썼다.
"조기 결정에 대해서 찬성 결의된 바 없다. 그리고 당신들은 2개월만에 회의록을 보내주고 이의가 있으면 3일 안에 연락을 하라니 이런 불공평한 일이 어디있느냐."
그러자 취리히에서 바로 회신을 보내왔는데 대체적 합의(General Consensus)라고 고치겠다는 것이었다.
다시 항의문을 보내고, 나를 포함해 서너명만이 발언했는데, 이것이 어떻게 대체적 합의냐고 지적했다.
우리는 에콰도르로 이동했다. 에콰도르에서는 17세이하 청소년축구대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에콰도르에 머물고 있을 때 한국대사관에서 리셉션을 열고 아벨란제 회장을 초청했다.
아벨란제 회장은 선약을 이유로 부인만 참석케하고 본인은 불참한다고 통고하며 대신 나를 오후 5시까지 자기 방으로 오라고 했다.
나는 조기 결정문제에 대해 의견을 말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함께 출장중이던 이복형 위원에게 통역을 부탁했다.
이복형 위원은 아르헨티나, 멕시코 대사등 중남미 대사를 역임, 스페인 말에 능통 했다.
활달한 성격에 성악도 능하셔서 유치 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신분이다.
이 위원과 함께 방에 들어 가보니 그 자리에는 젠.루피넨 사무차장도 있었다.
회장은 언성을 높여 나에게 훈계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나이지리아로 예정됐던 95년 청소년축구대회 개최지를 나이지리아의 전염병 때문에 변경하려고 했는데 왜 협조 안했느냐며 "회장이 그러겠다면 협조해야 하는 것 아니오"라고 말했다.
아벨란제 회장은 24년간이나 FIFA회장직에 있었고, 또 국제 스포츠계의 기류로 보나, 그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FIFA부회장으로서 선출직이기 때문에, 독자적인 의견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한시간쯤 언성을 높인 회장은 기분이 조금 풀렸는지 말을 멈추었다.
그는 조기 결정이 싫으냐고 물었다.
내가 모든 것은 규칙대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자 그는 간단하게 말했다.
"알았소, 그러면 조기 결정을 안하면 될 것 아니오. 대신 앞으로는 내 말을 잘 들으시오."
이렇게 해서 조기 결정 문제는 해결됐다.
그해 가을 취리히에서 열린 5인 비상 위원회는 아벨란제 회장이 말한대로 조기 결정안을 정식으로 폐기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 표 대결을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나는 게임은 공정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조기 결정을 반대했던 것이다. [월.화 연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