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칼럼]서세원-'허구의 인물'이 주는 웃음세상
기사입력 1999년 04월 28일 14시 55분
홍길동, 손오공, 원더우먼, 슈퍼맨….
우리들은 어렸을 때부터 마음속에 수많은 우상을 간직하며 살아왔다.
왠지 사람들에게 친근감을 주고, 초능력을 가진 그들은 정의를 위해서라면 어디든지 쫓아가는 모습을 사랑해왔다.
허상과 허구의 인물을 우상으로 만들고 대리만족을 느끼는 게 우리들이다.
그래서 내가 진행하고 있는 KBS 2FM `두시가 좋아'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도 이런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해서 `빨간바지'라는 허구의 인물을 상징적으로 만들어 놓았다.
잠시 설명하면, 빨간바지는 `두시가 좋아'라는 프로그램의 모든 것을 감시한다.
다시말해 `두시가 좋아'라는 라디오 프로그램 PD를 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는 나의 주특기인 벌점제도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인물이다.
빨간바지는 모든 악동의 역할을 자청하며, 내가 청취자들에게 주관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도록 나름대로 객관적인 시선을 갖고 활동한다.
물론 빨간바지 덕분에 청취자와 나는 좀 더 가까운 아군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보통, 전화연결을 하는 청취자들에게 제동을 거는 역할은 빨간바지의 몫이다.
노래를 못하는데 잘한다고 우기거나, 겸손하지 못한 태도를 보이거나, 도덕적이지 못한 행동이나 말을 하는 사람에게 빨간바지는 가차없이 벌점을 내린다.
하지만, 감동적이거나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 앞에서 빨간바지는 약해진다.
빨간바지는 일단 화가나면 얼굴이 빨개지며, 슬플때는 빨간수건을 들고 구석에서 훌쩍이곤 한다.
발목이 드러나는 빨간바지에, 빨간 양말과, 빨간 에나멜 구두를 즐겨 신고, 머리까지 빨간색으로 염색을 했다.
오토바이를 즐겨타며, 화가나면 서울에서 부산까지도 청취자를 2분만에 쫓는 괴력의 사나이기도 하다.
멋진 수정만화의 주인공보다 우스꽝스런 명랑만화의 주인공이 쉽게 우리들이 친구가 되는 것처럼 빨간바지는 웃기면서도 순수한 맘을 갖고 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얼마든지 빨간바지의 모습을 머리속으로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라디오 하나로 사람들에게 오디오의 효과까지 챙길 수 있다.
나는 사람들에게 자주 묻는다.
"빨간바지가 출동했습니다. 노래를 너무 못했기 때문에 빨간바지와 함께 교육장으로 오셔야 겠습니다. 지금 빨간바지가 유리창에 붙어있는게 보입니까?"
물론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청취자들은 "네, 보입니다. 저… 교육들어갈 때 준비물은 뭐죠?"라고 내 말에 공감대를 형성해 준다.
그러면 난 "그럼 침대 사이즈와, 빨간 내의 7벌, 그리고 빨간 칫솔까지 준비하십시오!"라고 지정 해 주곤 한다.
그러면 `두시가 좋아' 가족들은 통쾌하게 웃을 수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빨간바지로 우리들만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경쟁사회 속에서 갖가지 점수제도를 겪으며 쫓기듯 살고 있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이 일상화 된 생활 속에서, 우리들은 `빨간바지'라는 허구의 인물을 우상화시키며 대리만족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빨간바지가 벌점을 주는 것은 씩 한번 웃고 넘길 수도 있다.
일상생활의 초조함을 빨간바지와 함께 웃음으로 승화시킬 수 있기에 말이다.
[방송MC]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