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길연씨] 파괴된 가정속 여성의 자아찾기
기사입력 1999년 04월 25일 15시 17분
지난해 장편소설 `변명'으로 화제를 모았던 정길연(38). 그녀가 창작집 `종이꽃'(이룸)을 내놓았다. 84년 등단 이후 발표한 중．단편 중 9편을 묶었다.
15년에 걸친 작업의 결실이다. 그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정씨는 줄기차게 가족에 대해 질문해 왔다. 그 가족들은 결코 행복하지 않다. 여러 이유로, 가족은 파괴된 상태다. 소설들은 해체된 가족관계 속에서 여성들이 나를 찾는 고단한 과정을 그린다.
별거, 이혼, 임신중절, 아버지의 외도, 홀로 남은 어머니와 딸의 불화 등이 작품집 전체를 관통한다.
대표적인 예가 `숲의 나무.' 이 작품엔 흔히 볼 수 없는 인물들이 나온다. 나와 남편, 새 여자의 기묘한 관계. 주인공 위연은 남편과 새 여자와의 연애를 거의 방관한다. `그저 대낮에 꾼 불길한 꿈처럼 잊으려고 애쓸 뿐'이다.
아니, 더 희한한 장면도 연출한다. 위연은 이혼한 남편의 새 아내가 출산하는 과정을 보호자로서 지켜본다. 전남편은 위연과 낳은 아이와 스키를 타러 가고. 지독한 아이러니다.
위연은 이같은 상황에서도 전혀 `맹렬한 적의'를 드러내지 않는다. `미안하다는 말 참 알량한 속임수에요'라고 응수할 뿐이다. `식물형' 인간, 그녀만의 독특한 삶의 방식이다. 몇몇 여성작가들의 작품과 다소 구별되는 부분. 하지만 이같은 구도는 인기작 `변명'을 너무 빼닮았다.
표제작 `종이꽃'은 별거 중인 부부의 갈등을 그린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어머니와 딸의 불화.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부부는 화해하게 된다. `동요' `가족수첩' 등도 일그러진 가족관계를 다룬다.
작품 대개가 우울한 소재들. 하지만 정씨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문장으로 작품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시적이면서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는 언어가 곳곳에서 빛난다.
그러나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은 천편일률적. 부부, 가족문제에서 시야를 넓히지 못한 것도 한계로 지적된다.
[임정식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