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소설] 폴라리스 랩소디 (29)
기사입력 1999년 04월 02일 15시 21분
키 드레이번은 서두르지 않는 걸음걸이로 갑판에 올라섰다. 비명소리가 요란하던 자유호의 갑판은 거짓말처럼 고요해졌다. 하지만 조금 떨어진 다른 배에서는 여전히 고함소리가 들려왔고, 그래서 식스는 이를 갈았다. `저 머저리 선장들은 제 부하 간수도 못하나.' 키는 삼엄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잠꼬대라면 너무 시끄럽고, 반란이라면 너무 멍청하군. 네놈들은 뭘 하고 있는 거지."
오닉스가 재빨리 손을 내밀어 조금 전 취했던 동작을 다시 반복했다. 키는 오닉스의 마스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율리아나 왕녀를 죽이겠다고? 왜?"
오닉스는 `이 귀신 소리를 들어보라！ 함대에 귀신이 붙었다. 바다는 여자를 싫어한다. 지금이라도 바다에 여자를 던져 해신（海神）께 사죄드려야 한다'고 빠르게 손짓했다.
"귀신이라고 했나?"
오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키는 싱긋 웃었다.
"귀신에 대해 알고 싶나?"
오닉스는 주춤했다. 그리고 주위의 해적들도 의아한 표정으로 키를 바라보았다. 키는 설명하는 대신 앞으로 걸어갔다. 오닉스는 키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도끼를 두 손으로 쥐었다. 하지만 키는 맨손이었다. 게다가 키는 두 손을 버클에 얹은 채 걸어왔다. 식스는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응? 말해봐. 귀신에 대해 알고 싶나? 귀신을 보고 싶나?"
어느새 키는 오닉스의 바로 앞까지 걸어왔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지만, 오닉스는 비무장인 키를 상대로 도끼를 들어올릴 수도 없었고 뒤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마스크 때문에 오닉스의 표정을 알 수 없었지만, 그 아래에서 뿜어져 나오는 급한 숨소리는 오닉스의 긴장상태를 잘 나타내고 있었다. 키는 오닉스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네 눈이 귀신을 보게 하고 싶은가? 죽음을 보고 싶나?"
퍼－억. 키의 주먹이 오닉스의 복부에 꽂히자 오닉스는 급하게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키는 오닉스의 멱살을 붙잡아 끌어올렸다. 키는 오닉스의 얼굴을 자기 얼굴 바로 앞까지 끌고와서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오닉스를 바라보았다.
"말해봐라, 이 후레자식아. 귀신을 보고 싶나? 귀신을 보고 싶나? 내 눈을 봐！"
오닉스는 자신이 손에 도끼를 들고 있다는 사실도 거의 잊어버렸다. 그는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키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밤인데도 불구하고 키의 동공은 극히 작게 축소되어 있었다. 키는 이를 갈며 말했다.
"나는 매일 귀신을 본다. 이 눈동자에 붙어있기 때문에, 눈을 감아도 피할 수 없지. 내 눈을 봐라, 오닉스 나이트. 귀신을 보고 싶다고 했나? 내 눈을 봐라. 수천 마리의 귀신이 바글거리는 것이 보이지 않아?"
오닉스는 키의 눈 속에서 귀신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키가 죽인 뱃사람들, 그가 침몰시킨 배, 화염이 불타오르는 돛대와 폭풍에 찢긴 돛, 포연과 피바람 속에 으르릉거리는 해골들의 군무. 오닉스는 키의 눈 속에서 그것들을 보았다. 그의 입이 힘없이 벌어졌다.
그러나 오닉스가 말을 토해놓기 직전 키는 오닉스의 멱살을 놓아주었다. 오닉스는 무의식 중에 뒤로 물러났다. 키는 오닉스의 멱살을 쥐고 있던 자신의 손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손가락들이 하나씩 굽혀지고, 키는 손이 하얗게 변하도록 주먹을 감아쥐었다. 키는 그 주먹을 옆으로 뿌리면서 말했다.
"식스！"
"예！"
"라이온에게 전해라. 레보스호의 화물실을 뒤져라. 노래를 부르고 있는 꽃이 있을 것이다. 싱잉 플로라다."
식스는 입을 쩍 벌렸다.
"아… 노래하는 꽃 말씀입니까? 이게 그겁니까?"
"내게로 가져와라."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