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소설] 폴라리스 랩소디 (24)
기사입력 1999년 03월 28일 15시 11분
늦은 오후의 햇살이 수면 위로 미끄러졌다.
식스는 자유호의 선교에 우뚝 선 채 레보스호를 바라보았다. 레보스호에 실려 있는 엄청난 양의 화물은 도저히 자유호로 옮겨실을 수 없었다. 그래서 레보스호를 통째로 끌고가기로 결정했다.
레보스호를 끌고가기 위해선 레보스호의 선원들이 필요했다. 그래서 라이온에게 그 선발을 맡긴 식스는 분통이 터지는 것을 참으며, 입술을 꾹 다문 채 레보스호를 쏘아보고 있었다.
라이온은 식스의 눈길을 충분히 느꼈고, 그래서 더욱 즐거운 마음으로 식스의 비위를 박박 긁는 일을 수행했다.
라이온은 기세좋게 외쳤다.
"다음 녀석！"
해적들이 갑판에 무릎꿇린 채 꽁꽁 묶여 있던 카밀카르 전투병 중 한 명을 일으켜 세웠다. 병사는 증오가 담긴 눈으로 라이온을 바라본 후 직접 뱃전을 향해 걸어갔다.
레보스호의 오른쪽 뱃전에는 라이온이 `감별사'라고 부르는 판자가 바다를 향해 길게 뻗어 있었다. 당당하게 걸어간 병사가 판자 위에 발을 올렸다. 라이온은 지금껏 몇 번이나 반복했던 질문을 지겨워하는 기색도 없이 되풀이했다.
"자, 묻겠다. 친구. 상어가 될 텐가, 상어밥이 되겠는가?"
병사는 고개를 돌려 라이온을 향해 싱긋 웃어주었다.
"지옥에서 만나지."
라이온은 실망한 기색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마지막은 자신의 취향대로 걸어가도록 배려한다는 원칙을 세워두었기 때문에 칼로 포로의 등을 쑤셔대는 짓은 하지 않았다.
병사는 천천히 판자 위를 걸어갔다. 뱃전에 와 부딪히는 잔물결소리와 늦은 오후의 햇살만이 고요히 떨어져 내리는 가운데 병사는 뒤로 팔이 묶인 채 수평선을 향해 걸어갔다.
판자 끝에 선 외로운 병사는 마지막으로 고개를 들어 붉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짧은 정적 후 병사는 마지막 걸음을 내디뎠고, 곧 판자 위에서 병사의 모습은 사라졌다. 풍덩！ 물소리가 들려올 뿐, 배 위의 아무도 뱃전으로 머리를 내밀어 수면 위에 그려지는 파문이나 물보라를 보지는 않았다.
해적들은 커다란 칼을 짚은 채 묵묵히 고개를 숙였고, 라이온 역시 고개를 숙여 사내의 저승길이 편안하기를 기도했다. 짧은 기도를 마친 라이온은 곧 표정을 바꾸며 외쳤다.
"다음！"
해적들이 일으켜 세운 병사의 얼굴은 어려보였고, 게다가 얼굴 근육 전체를 푸들푸들 떨고 있었다. 그는 걸음을 떼지 못했다.
해적들은 라이온을 한번 쳐다본 다음 젊은 병사의 겨드랑이에 팔을 쑤셔넣었다. 젊은 병사는 발을 질질 끌면서 판자 쪽으로 끌려갔다.
"젊은 친구. 상어가 될 텐가, 상어밥이 될 텐가?"
젊은 병사는 애처로운 표정으로 라이온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이 몇 번 움직였지만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가쁜 숨소리만이 새어나올 뿐이었다. 그러나 라이온은 그 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라이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집어넣어."
"아, 아냐…"
"집어넣어！"
라이온은 젊은이의 목소리가 묻힐 정도로 크게 고함질렀다. 해적들은 재빨리 사내의 등을 떠밀었고, 젊은 병사는 비명을 지르며 바다에 빠졌다. 갑판에 남아있던 병사들의 얼굴 위로 무서운 공포와 침묵이 동시에 흘렀다.
라이온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이번에 그의 입에서 새어나온 것은 기도가 아니었다. 라이온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죽는 것까지 도움을 받아야 하는 자네에겐 삶의 댓가가 너무 무거울 걸세, 친구. 자네가 방랑하기에 이 세상은 너무 황량해."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