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소설] 폴라리스 랩소디 (22)
기사입력 1999년 03월 25일 15시 01분
키 드레이번은 자신의 책상 뒤에 앉아 두 손으로 턱을 고이고 율리아나 왕녀를 바라보았다. 왕녀는 방 가운데 서서 키의 시선을 참아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키가 그녀에게 앉으라는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앉으라는 말 뿐만 아니라 왕녀가 선장실에 들어온 이후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율리아나 왕녀는 많은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왕녀는 조금 전까지 불안감과 공포 쪽에 많이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참을 수 없는 호기심으로 제국의 공적 제1호를 바라보았다. 키는 그 호기심 어린 시선에 조금 놀랐다. 그리고 그 놀라움 때문에 키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불쾌해 할 줄 알았는데. 독특한 아가씨군."
"예?"
"…거기 앉으시오."
"아, 예."
왕녀 역시 그제서야 생각났다는 투로 의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의자를 끌어와 책상 앞에 놓고 그 위에 앉아서 다시 키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아무 말없이 묵묵히 서로를 응시했다. 키는 두번째로 항복하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그에겐 익숙한 일이 아니었다.
"소개해야 되는 거겠지. 키 드레이번이오."
"율리아나입니다. 이곳은 궁전이 아니니 길고 복잡한 이름 다 부르지 않아도 되겠지요?" "다 기억하기는 하오?"
"딜비움 그랜다이 레보라 아크 리 바레린 길리데아 율리아나 카밀카르에요."
고풍스러운 엘프식 작명법에 따른 길고 긴 이름을 들은 키는 미소를 짓고 말았다. 그 미소를 본 율리아나 왕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웃으시네요…?"
"입이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키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율리아나 왕녀가 팔걸이를 꽉 움켜쥐었고, 그녀의 동공은 잔뜩 팽창된 채 키의 움직임을 쫓았다. 책상 옆을 돌아 왕녀 앞에 온 키는 책상 귀퉁이에 걸터앉아서 왕녀를 바라보았다.
왕녀는 키의 턱을 올려다보는 대신 고개를 숙여 자신의 무릎을 보며 말했다.
"말해두겠어요. 라이온씨는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자살미수범이에요. 바다로 뛰어들려고 했었지요."
"왜 그런 짓을 했소?"
"당신에게 나를 제공할 의사는 별로 없으니까요. 지금도 그 결심은 그대로에요."
율리아나 왕녀는 말을 마치며 한껏 표독해보이는 표정을 지으려 애쓰면서 키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왕녀가 눈을 크게 뜨자 모양만 더욱 둥글게 바뀌었을 뿐이었다. 왕녀의 소기의 목적, 즉 키를 위협하려는 목적에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키는 고개를 조금 가로저었다.
왕녀는 입을 앙다문 채 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제국의 공적 제1호. 제국의 8할을 휩쓸고 열한 개의 왕관과 여섯 개의 지팡이를 파괴한 마법사 하이낙스 이후 두번째로 그런 칭호를 받은 사내. 그것은 키 드레이번의 강력함을 나타내는 의미가 아니다. 하이낙스가 제국에게 어느 정도의 타격을 주었는지를 나타내는 증거일 뿐이다.
제국의 최전성기라면, 이런 해적에게 제국의 공적 제1호라는 칭호를 주는 것은 광대의 재담거리도 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제국이 그 정도로 처절한 타격을 입었기에 이런 해적의 발호도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 이름만으로 제국의 모든 뱃사람을 진감케 하는 사나이가 말했다.
"당신, 착각하고 있군."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