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소설] 폴라리스 랩소디 (21)
기사입력 1999년 03월 24일 15시 06분
라이온 갑판장은 자신의 볼을 움켜쥔 채 율리아나 왕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왕녀는 하고 싶은 일을 마쳤다는 듯한 얼굴로 몸을 홱 돌렸다.
"어어어?"
라이온은 얼빠진 비명 소리를 내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몸을 돌린 왕녀가 그대로 뱃전을 향해 달음박질치기 시작한 것이다. 라이온은 다급하게 외쳤다.
"잡아！ 빠질 생각이야앗！"
그러나 그 순간 해적들은 뼛속까지 스며있는 미신적 믿음 때문에 주춤거렸다. `갑판장이나 오닉스 선장 같은 사람이면 모르지, 우리 같은 놈들이 여자를 만지면?' 해적들은 몇 년 동안 횡액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주춤거렸다.
그래서 율리아나 왕녀는 아무 방해없이 갑판을 거의 가로지를… 뻔했다. 느닷없이 갑판 해치가 열리지만 않았다면.
갑판 해치가 느닷없이 열리며 아래로부터 사내의 머리 하나가 불쑥 올라왔다. 율리아나 왕녀는 해치 바로 앞에서 가까스로 멈춰섰다. 그래서 사내는 왕녀의 치마 속으로 머리를 들이민 형국이 되어버렸다. 왕녀는 기겁성을 지르며 치맛단을 여몄다.
"꺄아아악！"
뒤로 물러나던 왕녀는 그대로 갑판에 주저앉아 버렸다. 치맛자락이 치워지자 그곳에서는 한 노잡이 노예의 멍한 얼굴이 나타났다.
갑판 위 모든 사람들이 굳어있는 가운데,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노예가 후다닥 갑판 위로 뛰어 올라왔다. 그러나 노예는 멀리 도망가지 못했다.
급히 달려온 라이온 갑판장이 노예의 팔목을 나꿔채 뒤로 꺾어올리자 노예는 비명을 내질렀다. 일단 노예를 붙잡긴 했지만 라이온 역시 당황하여 노예의 뒤통수를 향해 무턱대고 호통을 쳤다.
"어? 이놈！ 너 누구냐?"
그 때 노예장의 찢어지는 고함소리가 아래로부터 들려왔다.
"오스발, 너 이 자식！ 거기 안서? 제발 서란 말이야！ 안 때릴 테니까 거기 서！ 너 이 자식, 잡히면 죽어！"
노예장의 고함소리에는 거의 애걸하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노예가 감히 갑판 위까지 뛰어 올라온다는 것은 그 노예의 목을 쳐버리는 것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노예를 감독해야 할 노예장 자신도 무사하기 어려운 대사건이다.
잠시 후, 오스발이 뛰어나온 구멍 속에서 노예장의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불쑥 올라왔다.
씨근거리며 사다리를 올라서던 노예장은 눈앞의 광경을 보자 그만 굳어버리고 말았다.
"가, 갑판장님…！"
라이온은 자신이 붙잡은 노예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 놈 노잡이야?"
"그, 그렇습니다만."
"아！ 그렇지. 아까 기절했던 그 놈이구만?"
라이온 갑판장은 껄껄거리며 오스발을 놓아주었다. 오스발은 팔을 주무르며 황급히 무릎을 꿇었고, 라이온은 다시 싱긋 웃었다. 라이온은 주저앉은 왕녀를 부축하며 오스발에게 말했다.
"찢어죽일 놈이다만, 덕분에 나도 살고 왕녀님도 살았다. 감히 갑판 위까지 뛰어 올라온 것은 용서해주지."
오스발은 갑판에 이마를 대며 라이온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미소를 띤 채 오스발을 보던 라이온은 고개를 돌려 갑판 위로 올라온 노예장을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네 녀석은 용서못해. 노예 관리를 어떻게 하면 노잡이를 기절시키고 갑판 위까지 도망치게 만들 수 있는 거냐? 조금 있다가 나한테 찾아와！"
갑판장의 얼굴이 노랗게 바뀌었지만 그 역시 아무 말 없이 이마를 바닥에 댄 채 무릎꿇었다. 라이온은 그런 노예장을 무시하며 왕녀의 팔을 힘주어 붙잡았다.
"왕녀님. 선장실로 안내하겠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