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칼럼] 서세원의 세상살이 - '아버님의 수학'
기사입력 1999년 03월 17일 14시 36분
`우체국에 가면 잃었던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KBS 방송국 입구를 들어서다보면 언제나 북적거리는 사람들과 넘치는 사연으로 가득찬 우체국 하나가 눈에 띈다.
무심코 `오늘이 며칠이더라'하는 생각을 하는 순간 나는 잽사게 우체국에 달려가 줄을 서게 된다.
`아버님이 꽤나 기다리셨겠지' 생각하면 마음이 급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는 직원의 한마디에 문득 아버님의 부재를 깨닫고 무안하게 뒤돌아선다.
이일을 몇번이나 반복을 했는지 모른다.
가끔 이런 내가 우습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해 아내에게 사실을 고백하니 아내의 반응이 더욱 놀라웠다.
"나도 말일엔 버릇처럼 우체국엘 가게돼요…."
돌아가신 아버지는 파타고라스 같은 수학자도 모방할 수 없는 아버님만의 독특한 계산법을 하나 갖고 계셨다.
매달 말일에 돈을 부쳐드리기로 하면 다음달은 열흘씩 먼저 카운트다운을 하시며 재촉 전화를 하곤 하시는 것이다.
아버지의 재촉에 못이겨 다음달은 25일쯤 돈을 부쳐드리게 되고, 그 다음달은 20일 쯤, 그 다음달은 15일쯤 돈을 부쳐드리게 된다.
얼마안가 결국 한달에 두 번 돈을 부쳐드리게 된다.
아버지께선 이런 아버님만의 계산법을 `김일성 수학'이라고 하셨다.
황당한 억지로 공식이 증명되는 아버님만의 김일성 수학을 나름대로 이해 하면서도 그 내면의 깊은 뜻은 알 수가 없었다.
얼마전 집에 돌아가니 책상 위에 작은 소포 꾸러미가 눈에 띄였다.
미국에 가있는 딸아이의 이름 석자가 쓰여진 소포였다.
순간 뜯기도 아까울 정도의 뭉클한 감동이 물결쳤다.
조심스레 벗겨낸 포장지도 잘 접어 보관했다.
그날 저녁, 난 비로소 해답을 찾게됐다.
그토록 풀리지않던 아버님의 김일성 수학. 그 해답을….
아버님은 아들에게 무언가를 받는다는 느낌이 너무 좋아서, 그걸 기다리는 즐거움이 너무 좋아서, 나를 재촉했던 것이다.
그럴줄 알았으면 많은 액수는 아니더라도 자주 보내드릴 걸….
아버님이 은행의 온라인이 아닌 우체국의 전신환을 그토록 좋아하셨던 것도 다 기다리고 찾는 재미가 느껴져서 일게다.
어찌 그 해답을 이제야 찾게 됐는지, 안타깝기 그지없다.
오늘도 우체국엔 침으로 우표를 붙이고, 어두운 눈으로 주소를 쓰는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나도 그 틈에 섞여보고 싶다. 기다리고 찾는 즐거움을 주고 싶고, 받고 싶다.[방송 MC]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