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눈물로 읽는 '어른동화-센닌바리'
기사입력 1999년 03월 16일 15시 43분
작가 김녕희의 최근작-`센닌바리'. 열 두살 소녀-가희의 눈을 통해 바라 본 한 여인의 애사(哀史)다. 일제 말기, 식민지 시대, 한국 여인들의 애사(哀史)다.
이 소설은 `어른을 위한 동화'다. 그럼에도, 내용은 처절하다. 아니, 애잔하다. 눈이 아려 온다. 아름답다.
"1945년 8월부터 이듬해 봄까지의, 시대의 격랑에 휘몰린 한 가문의 부침의 기록이다."
센닌바리(千人針)는, 무명천에 붉은 실로 `무운장구(武運長久)'라는 글씨를, 천명의 여자가 한뜸한뜸씩 뜬 수건.
출정 병사가 센닌바리를 머리에 매거나 허리에 두르면 전장의 총알이 비켜 간다는 거다.
－독오른 눈으로 여기저기를 찾던 이시가와는 마침내 도토리나무 밑 풀숲에서 아버지가 숨은 굴을 찾아냈다. "안돼요! 안돼!" 결사적으로 울부짖는 엄마를 젖히고 이시가와는 아버지에게 수갑을 철컥 채웠다. 아버지는 수갑이 채워진 손으로 가희의 눈물을 씻어 주었다.－
어머니는, 폐병쟁이 남편을, 징병에서 빼주겠다는 약조를 받고 군청서기 이시가와에게 몸까지 바쳤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센닌바리를 머리에 두르고 징병에 끌려 가고 말았다. 일본의, 대동아전쟁의, 총알받이가 되기 위해…. 엄마는 무겁게 말했다. "너의 외삼촌은 센닌바리를 세개나 가지고 갔건만…." 필리핀 근방의 섬으로 간다는 짧은 엽서가 한장 왔을 뿐, 외삼촌에게선 반년이 넘도록 여전히 감감 무소식이었다.
센닌바리는 결국, 한 의식일뿐, `무운장구'와는 거리가 멀었다. 천조각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일제 식민지 시대의, 우리 여인들은 센닌바리를 만드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작가 김녕희는, 센닌바리를 통해, 당시 우리 여인들의 애사를, 그리고 가희와 그 남자친구, 일인 중학생 가즈오(이시가와의 조카)의, 아름답지만 어차피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는 우정을 대비시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정서적 갈등'을 표출하고 있다.
전쟁이 끝나고, 미처 도망못간 이시가와는 결국 가희의 아버지가 피신했던 바로 그 굴 속에서 굶어 죽고 만다.
－가희가 아버지의 생존 소식을 들은 것은, 그 해 봄이 끝나갈 즈음의 저녁 무렵이었다. 동구 밖으로 주황색의 찬란한 석양이 지고 있었다. 가희의 어린시절도 황홀하도록 찬연한 노을 속으로 스러지는 저녁빛 처럼 막을 내리고 있었다.－
"살다보면,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많다. 비애, 분노, 그리고 사랑이란 단어까지도…. 한곳을 계속 맴돌고 있는 듯한 어지러움은 무엇에서 오는 걸까? 안개 속같은 세상과 나는 언제쯤 유쾌한 악수를 나눌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