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칼럼] 강우석의 레디고
기사입력 1999년 03월 15일 14시 52분
스티븐 스필버그는 한때 "외계인일지 모른다"는 황당한 논쟁에 휩싸였다.
또 스스로 스필버그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 같은 제임스 카메론은 작년 아카데미상에서 "나는 세계의 왕이다"란 망발(?)을 해 화제를 모았다.
물론 나는 스필버그가 지구의 영화를 발전시키라고 외계에서 파견된 밀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카메론 역시 국제 경제문제를 해결하고 분쟁을 조정할 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은 적어도 영화분야에 있어서 당대 최고의 영향력을 가진 인물임에 틀림없다.
둘은 전세계 영화팬들을 열광시키며 흥행기록을 계속 바꾸어나갔다.
요즘 한국영화계는 축제 분위기다.
강제규 감독의 `쉬리'가 스필버그의 `쥬라기 공원'과 카메론의 `타이타닉'이 세운 국내 흥행기록이 별거 아니란 듯이 흥행가도를 질주하고 있다.
한국영화가 거대한 공룡같기만 했던, 타이타닉호처럼 크게만 느껴졌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맞대결을 펼치고 있다는 사실, 얼마나 통쾌한 일인가.
하지만 나는 많은 사람들이 샴페인을 터뜨리며 축제를 펼치는 동안 사무실 근처 포장마차에서 깡소주를 마시며 한국영화계의 고민을 혼자 다 짊어진 양 사색의 시간을 가져보곤 한다.
한국영화의 르네상스가 왔다는 말은 몇년전부터 심심치않게 나왔다.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대형히트작들이 한국영화에서 자주 나오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럴 때마다 자문을 해본다.
"혹시 일시적인 현상은 아닐까." "외국영화가 볼만한 게 없어서 그런 건 아닐까" "진짜 우리 영화가 좋아진 건가"
뭐 대충 이런 생각들이다.
소주를 한병 정도 마시고 취기가 오르기 시작하면 이런 생각도 한다.
내가 제작자의 길로 접어든 것은 `아직도 뭔가 한쪽에 채워지지 않은' 그런 꿈을 실현시킬 감독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었나 하는, 그런 생각이다.
영화를 본 관객들의 질린 표정이 보고 싶다.
더이상 할말이 없다는 관객의 탄성을 듣고 싶다.
나는 분명 그런 날이 올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다.
이젠 돈이 없어서 영화를 못만드는 시대가 아니다.
떠돌아다니는 돈이 주인을 못찾아서 슬퍼하는 소리가 적어도 내귀엔 들린다.
한국영화계에도 분명 외계인이나 왕은 있다.
이들이 있기에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는 시작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주위의 인재를 못알아 보았거나 인정해주지 않고, 스스로를 비하했는지도 모른다.
요즘 나는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신인감독들을 보며 다가올 미래의 풍성함에 나의 역할을 추스리기에 여념이 없다.
그들은 영상세대답게 독특한 장르, 감각적인 영상,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반짝인다.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한국영화의 미래는 밝다.
나는 오늘도 투자자를 찾는 시나리오를 한장씩 넘겨본다.
세상을 뒤바꿀 천재를 기다리면서….[영화감독 강우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