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칼럼] 서세원의 세상살이 (4)
기사입력 1999년 03월 14일 15시 31분
드라마 속의 명장면으로 기억되어서 일까.
언제부턴가 정동진역은 수많은 인파들이 몰리는 유명관광지가 되었다.
그런걸 보면 여행 중에서도 기차여행은 사람들에게 독특한 추억을 조리해 주는 양념이 되는 것 같다.
기차는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유년시절을 되돌아볼 때 기차에 대한 추억 만큼은 유난히 두꺼운 페이지를 차지한다.
기차를 보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아마도 새마을호가 처음 개통되었을 때인가 보다.
당시 서울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누나와 형을 만나러 가기위해 엄마와 나는 기차를 탔다.
철도청 공무원이셨던 아버지 덕에 남부럽지 않게 기차를 많이 타봤다고 할 수 있는 우리였지만 그래도 새마을호는 달랐다.
`경이로움과 황홀함'이라는 단어로도 수식하기 어려운 새마을호에 대한 나의 감동은 엄청났다.
뒤로 져처지는 의자와 미끈하게 깔린 카페트 위에 고무신을 벗고 타는 할머니들의 조심스런 행동을 나도 따라할 뻔 했을 정도니까 말이다.
그때 우리를 강타하는 감동의 결정타가 있었으니 들뜬 마음에 정신을 빼고 있는 우리 모자에게 아버지의 동료분께서 시원한 냉커피를 시켜준 것이다.
바닥에서 쪽쪽 소리가 날 때까지 아껴 마셨다.
정말 천국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바닥에 깔린 몇덩이의 얼음.
잠시 우리 모자 사이엔 이심전심의 무언가가 통하고 있었다.
이 아까운 걸 버려, 아니면 이 큰 걸 먹어, 하는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동안 나는 전자를 향해 마음을 돌리고 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달랐다.
주머니에서 금새 손수건 한 장을 꺼내 그 차가운 얼음을 꼭 쥐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직'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어느새 얼음의 반쪽은 내 입에 들어와 있었다.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때 나의 머리를 쭈빗 서게 했던 그 썰렁한 기운이란 얼음의 냉기가 아닌, 앞자리 단발머리 여자아이의 동그래진 눈이 이 순간을 포착했다는 사실에 얼굴이 빨개졌지만 얼음을 도로 뱉아내진 않았다.
오히려 오독오독 씹어먹음으로써 이 민망한 순간을 무마시키려 했다.
내 평생 먹어본 얼음 중에 제일 시워해하며….
얼마전 아버님 산소에 갔다가 내 아들 녀석에게 밤을 깨물어 반쪽을 건낸 적이 있었다.
아들은 대번에 `지저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순간 어린시절, 기차간에서 씹어먹던 얼음 반쪽이 생각나 피식 웃어버렸다.
세월이 지나면 내 아들도 알게될까.
쪼개먹는 콩 한쪽의 더 깊은 맛을… .
묵직한 사랑의 체취가 묻어있는 반쪽의 통통함을….
그날이 기다려진다.
[방송 MC]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