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소설] 폴라립스 랩소디(10)
기사입력 1999년 03월 11일 16시 07분
`폴라리스 랩소디'(10)
노예들은 이제 몽환 상태에 빠진 채 기계적으로 노를 끌어당겼다.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한가지 밖에 없었다. 상대방이 침몰하든 이 배가 침몰하든, 어서 이 추격이 끝났으면. 그래서 더 이상 노를 젖지 않아도 되게 된다면….
그 때 좌현에 앉아있던 노예 하나가 노를 놓았다.
갤리어스의 노는 전체가 하나가 되어 움직일 때 최고의 성능을 발휘한다. 하지만 최고 가속 상태에서 하나의 노라도 그 움직임이 흩어지면 치명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노예가 놓아버린 노는 당장 앞의 노에 부딪치고 뒤에서 다가오는 노에 걸리며 큰 소동을 일으켰다.
노예들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고 노를 놓아버린 노예 바로 옆에 앉아있던 노예는 겁먹은 표정으로 말했다.
"오스발? 오스발！ 무슨 짓이야?"
그러나 오스발의 얼굴을 본 순간, 노예는 그가 노예장의 폭력에 맞서 단호한 이상주의에 입각한 만민평등의 구호를 몸으로 외치거나, 혹은 치명적 허무주의에 입각한 자살충동을 행동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분명히 오스발은 반항심 때문에, 죽고 싶어서 노를 놓은 것이 아니었다. 선창을 쿵쿵 울리며 다가온 노예장이 시뻘개진 얼굴을 한 채 채찍을 높이 들어올렸을 때 그 점이 명확해졌다. 오스발의 상체가 앞으로 스르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풀썩. 오스발은 두 팔을 펼친 채 자신의 노 위에 쓰러졌다. 노예장의 채찍은 이 갑작스러운 사태에 멈칫했다. 그 옆에 앉아있던 노예는 온힘을 끌어모아 간신히 말했다.
"노예장님. 오스발 이 놈, 기절한 거 같은데요…."
자유호의 선교 위에 우뚝 서 있던 1등 항해사 식스는 좌현에서 일어나는 노의 움직임을 보며 대로했다. 어찌나 대로했는지, 식스는 평소에는 구사하지 않는 격한 언사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 칠칠치 못한 녀석들！"
그에 비해 라이온 갑판장은 보다 직접적인 행동을 취했다. 라이온은 당장 갑판 위로 몸을 날려 승강구의 해치를 열어젖히고 머리를 갑판 아래로 들이밀었다. 그리고는 그 포악성이나 다채로움에 있어 식스가 구사한 폭언과는 상대도 되지 않는 폭언들을 폭포수처럼 쏟아내기 시작했다.
식스는 그런 라이온을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갑판 아래에 있던 노예장은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라이온은 그렇게 노예장에게 지옥같은 욕설부터 한참 퍼붓고 난 후에야 해명을 요구했다.
"이 개놈의 자식아！ 어떻게 된 거야?"
"아, 저, 라이온 씨. 노예 하나가 갑자기 기절해서…."
"기절? 너 지금 기절이라고 했냐? 그게 어느 나라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말은 아냐！ 나는 그 말 몰라. 이 자식, 네놈이 대신 노를 잡아서라도 당장 원상복구햇！ 그렇잖으면 이 해역의 상어들은 오늘 저녁 식사로 머저리 노예장을 포식하게 될 거다！"
노예장은 황급히 오스발의 쇠사슬을 풀고 그의 몸을 질질 끌어냈다. 그리고 오스발을 대신해 노를 젓기 시작했다. 라이온은 그제서야 만족한 표정으로 머리를 들어올렸다.
콰앙！ 라이온이 걷어찬 해치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익숙하지 않은 노역 때문에 노예장은 당장 숨이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꽉 다문 그의 입술 사이로 해괴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으아아…. 히이이익…！"
그 모습을 보고 있는 노예들의 눈빛은 결코 동정심이라고는 할 수 없는 흥미로 가득 차 반짝거렸다. 땀을 비 오듯이 흘리면서, 노예장은 가물거리는 정신 속에서 결심했다. 으아아, 오스발 이놈！ 깨어나기만 해봐라！
그러나 오스발은 묵묵히 맡은 바 기절의 `임무'를 다하고 있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