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트소설] 태아 (3)
기사입력 1999년 03월 05일 15시 24분
그녀의 손에 약병이 들려있었다.
희진은 주먹하나 가득히 약을 따라내서 입안에 털어 넣었다.
미처 입안에 밀려들어가지 못한 알약들이 아무 데나 흩뿌려졌다.
파랗고 노란 알약들….
희진이는 그날부터 마치 중독자처럼 감기약을 삼켜대고 있었다.
뱃속의 죄악은 죽어야만 했다. 가장 처참한 모습으로 아무도 모르게….
거실에서 신년 특집 대담프로를 보고있는 어른들의 소리가 방안까지 들려왔다.
사회자는 가장 충격적이었던 사건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문제점들을 지적해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중고등학교 여학생의 출산에 대해 충격을 표시하고 있었다.
부모님들의 한탄의 소리가 새어나왔다.
희진의 어머님은 불쌍하다고 혀를 차대면서도, 미혼모가 된 여학생을 비난하는 것을 잊지 않으셨다.
마치 모든 것이 그녀의 잘못이라도 되는 것 마냥….
"그게 왜 내 책임이지? 왜? 왜…?"
희진의 입에서 부르짖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부모님은 못들으셨을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 밖에 없는 외동딸의 공부를 위하여 가장 구석에 빛이 잘 드는 남향 방을 희진에게 주셨는데,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잡음이 잘 안들렸고 소리도 새어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왜 저 텔레비전 소리는 저렇게 똑똑히 들리는 것인지….
희진이는 두 귀를 손으로 틀어막았다.
사회자는 잔인하게도 계속 희진이, 자신을 비난하고 있었다.
희진이는 지금 자신의 뱃속에서 자라나고 있을 악마에 대해 생각했다.
그 악마는 어쩌면 빨간 살갗과 주름진 얼굴을 가진 사랑스런 아기의 모습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많은 감기약과 세찬 학대에도 불구하고 그 악마의 질긴 생명은 끊어지지 않았다.
잠에서 깨어나 피로 침대가 젖어 있는 상상에 얼마나 희열에 차곤 했었나.
이 악마의 새끼가 유산되어 버린다면！
그러나 그 질긴 생명은 희진이를 비웃듯 너무나도 안온하게 희진이의 몸을 점령하고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희진이는 붕대로 탄탄하게 감겨진 배를 내려다 보았다.
절대로 자라나게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희진이는 자신의 배를 붕대로 졸라 매었다.
`만일 배가 불러와 부모님들이 아시게 된다면….'
어머니와 아버지는 희진에게 실망하실 것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볼 것이었다.
희진은 또다시 감기약을 한움큼 집어먹었다.
캡슐이 달착지근하게 그녀의 혓바닥에 달라붙었다.
눈물이 또 한 방울 침대를 적셨다.
`어쩌면 TV에 나온 그 여학생처럼 나도 분식점 화장실 같은 곳에서 이 원수를 내질러야 할 지 몰라. 그러면 TV에서 찍어갈 지도 모르지….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이 아파트에서 살지 못할 거야. 소문이 퍼질 테니까. 사람들이 나를 창녀 쳐다보듯이 보며 수군거리겠지…. 미주 그 기집애까지도 나를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겠지? 내가 누구때문에 이런 일을 당했는데, 나쁜 기집애！'＜계속＞
글·김문경(아이디:밀랍인형)
/하이텔 악몽따라&무진교(go sg9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