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칼럼] 서세원의 세상살이 (1)
기사입력 1999년 03월 03일 15시 21분
봄비가 내리는 날이면, 어머니는 "찔레꽃에 세번 빗방울이 닿았으니 올해는 풍년이 들겠다"라고 말씀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우리들은 엘리뇨 현상 때문에 요즘 비가 오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며 투덜거리곤 한다.
무지와 과학의 차이라고 보기엔 어머니의 말씀 속에 들어있는 따스함과 간절함이 끝없이 그리워진다.
라디오를 오랜 시간 진행해 온 나로서는 라디오란 매체에 정이 담뿍 들어있다.
그건 애청자들과 하나되는 그 느낌이 너무 좋아서다.
KBS 제2FM에서 방송되는 `2시가 좋아' 프로가 시작되면 생방송실의 전화는 불통이 될 정도다.
이런저런 사는 얘기, 기분 좋게 웃을 수 있는 시간을 라디오를 통해 만끽하고 싶은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일 것이다.
라디오 진행 중 전화연결을 하다보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한번은 "여보세요? 전 금산에 사는 은옥순인데유… 서세원씨 반가워유!"하며 전화를 걸어온 분이 계셨는데, 한마디로 날 꼼짝못하게 한 장본인이었다.
너무나 때묻지 않은 그 순수함에 그냥 웃음이 나왔다.
남편을 일찍 여의고, 시부모님을 모시고 금산 산골에서 라디오만을 벗삼아 살고 있다는 얘기를 어쩌면 그렇게 구수하게 늘어놓는지….
전화를 끊을 때쯤 선물을 드리려는데 "전 아무것두 몰러유. 선물 얘긴 하지 마셔유. 작가언니들이 말하면 혼낸댔어유"라고 대답하는 바람에 웃음바다가 되고 말았다.
사는 것이 힘들지 않냐는 질문에 남편대신 시부모님 모시고 아이들 키우며 열심히 사는데 뭐가 힘드냐며 밝게 웃던 은옥순씨.
그분의 사연이 나가고 난 뒤, 많은 격려의 편지들이 도착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우울하게 살아오다 은옥순씨의 전화통화를 듣고, 저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여자 여자 여자'를 신나게 불러대며 밝게 사는 모습에 감동받아 펑펑 울었다는 내용이었다.
또 재미있는 분들도 많다.
박순금씨라는 아가씨는 `감수광'을 불렀는데, 자신의 세계에 도취되어 `하나 둘 셋'이란 구령을 스스로 붙여가며 얼마나 예쁘고 귀엽게 부르던지….
그 방송이 나간 뒤, 구혼하는 대한민국 청년들의 전화가 빗발쳤다.
또 한번은 세탁소를 경영하는 분이 전화를 했는데, 사투리를 진하게 사용하는 분이었다.
얘기하는 도중 "제가 개새끼를 리어카에 이빠이 담아서…."
공영방송이었다.
가슴이 철렁! 하지만, 개새끼를 개새끼라고 하는데, 뭐가 잘못됐냐며 연신 개새끼라는 말을 해대는 통에 몹시 당황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쩌랴! 그분들이 그렇게 믿고 계신 것을….
우스웠던 일, 당황스러웠던 일, 감동적이었던 일….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세상살이다.
그래서 나는 오후 2시를 기다린다.
[방송 MC]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