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성의 풍속사] (88)가발
기사입력 1998년 05월 24일 14시 22분
계간 `내일을 여는 작가' 최근호를 보니 시인 신경림(63)이 어려웠던 시절을 돌이켜보는 글을 선보이고 있다. 특히 `귀뚜리가 나를 끌고 간다' 같은 작품은 IMF 사태 때문인지 더욱 울림이 크다.
`좁은 방 안 가득 모여앉은 동네 아낙네들/남정네를 꺼리지 않은 농익은 음담 속에서/아내의 여윈 손이 가발을 손질한다.'
그랬다. 서울 변두리의 아낙들은 푼돈을 벌기 위해 머리카락을 자르고, 가발공장에서 일을 받아오곤 했다. 고달픔을 덜기 위해 `남정네를 꺼리지 않은 농익은 음담'을 주고받으며.
존 우드퍼드가 지은 `허영의 역사'(세종서적)라는 책을 보면 가발에 대한 흥미로운 얘기들이 잔뜩 실려있다.
고대 로마의 여성들은 가발을 좋아했다. 머리털이 검은 사람은 금색 가발을 썼다.
북유럽의 게르만 원주민들은 정복자 로마인들에게 자신들의 아마빛 머리카락을 잘라 바쳐야 했다. 로마인들은 게르만족의 머리털을 모아 가발로 만들었다.
초기 기독교사회는 여성들이 가발 쓰는 것을 금기시했다. 사제들은 신자들에게 이렇게 설파했다.
"머리를 가발로 꾸미는 일은 곧 순결을 더럽히고 부정한 쾌락을 불러오는 행위와 같도다!"
그러나 멋부리기 좋아하는 여성들에게는 마이동풍이었다.
12세기가 되자 여성들은 천으로 만든 머리 장식을 썼다. 성직자들은 또 외쳤다.
"얌전치 못하도다!"
여전히 마이동풍이었다.
프랑스에서 남성용 가발을 유행시킨 장본인은 루이 14세. 그는 젊은 시절 숱이 많은 자신의 머리를 자랑했다. 불행하게도 30대 초반부터 머리털이 빠지더니 마침내 대머리가 됐다.
"이발사 어디 있느냐. 가발을 만들어 오거라!"
담당 이발사는 "왕의 가발을 만들기 위해 숱한 프랑스 남자들의 머리카락을 뽑아냈다"고 자랑하곤 했다. 루이 14세는 후일 가발에 분까지 뿌려댔다.
17세기의 여성들은 가발의 머리 타래를 한쪽 옆으로 늘어뜨리거나, 머리 꼭대기에서 두 갈레 봉우리를 세우면서 멋을 부렸다.
18세기말, 여성들은 터무니 없는 허영심에 빠져 머리를 60cm나 올렸다. 그뒤로 머리를 탑 모양으로 세우기도 했는데, 이 탑이 1770년대에는 76cm까지 올라갔다.
1776년3월 영국의 `레이디스 매거진'은 웃기는 독자편지 한통을 소개하고 있다.
`내가 본 숙녀 몇 사람은 무척 아름다웠는데, 자기 키의 절반은 되는 진저리나는 그놈의 가발을 이고 있어서 이목구비가 영 딴판으로 일그러진데다, 사냥감 꽃 과일 풀 리본 핀 따위를 얹었기 때문에…(중략) 그 멋진 건축물이 망가질까봐 조심조심 움직이고 말하느라고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 모르겠다.'
신경림의 가발과 옛날 유럽인들의 가발은 얼마나 다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