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지하철 노선 한눈에 띄게 만들었어요'
기사입력 1998년 05월 13일 15시 12분
"시민을 위한다면 이 `약도'를 꼭 사용해야만 합니다!"
정부를 상대로 자기가 그린 지하철 안내도를 사 달라고 세일즈하는 남자가 있다.
배 룡씨（31．서울 노원구 상계동）.
서울시 각 지하철 역사（驛舍）에 붙어있는 노선 안내도를 자기가 만든 `서울시 지하철 스피드 안내도'로 바꿔야한다며 지난달부터 정부를 상대로 탄원서를 내고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는 `현대판 김정호'다.
배씨는 역사의 안내도와 스피드 안내도를 일자 못과 십자 못에 비유한다.
"일자 못과 십자 못이 있을 때 누구나 십자 못을 씁니다. 편리하기 때문이죠."
배씨의 스피드 안내도는 목차와 약도 2개로 나뉜다.
목차에는 가나다 순으로 역사 이름과 숫자가 적혀 있어 행선지（行先地）를 목차에서 찾은 뒤 옆에 적힌 숫자를 약도에서 찾으면 금세 행로（行路）를 알 수 있게 돼 있다.
"서울역에 도착한 시골노인이 이대입구를 간다고 칩시다. 목차에서 이대입구를 찾아보면 옆에 숫자 241이 적혀 있습니다. 241은 2호선 41번 역을 줄인 거에요. 약도에서 241을 찾으면 신촌과 아현역 사이에 있는 이대입구 역을 이내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배씨는 86년 지하철 2호선을 탄 한 벙어리 여학생이 길을 몰라 엉엉 우는 모습을 본데 이어 95년 청각장애인 모녀가 플랫폼을 오가며 목적지를 찾아 헤매는 장면을 맞닥뜨린 뒤 묻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스피드 안내도를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됐다고 한다.
"1년 6개월간 350여군데 역사를 샅샅이 찾아다녔습니다. 역사 번호가 틀리면 안되잖아요. 6개월은 약도 그려줄 업체를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나 워낙 복잡한 작업이라 싼값에 해주겠다는 사람이 없더군요. 하는 수 없이 제가 직접 매킨토시 사용법을 익혀 약도를 그렸습니다."
지난해말 스피드 안내도를 완성한 배씨는 올초부터 이를 명함 4장 크기의 종이에 인쇄해 지하철 승객들을 상대로 무료로 나눠주고 있다.
지금까지 배포한 안내도는 총 1만여장. 제작비는 뒷면에 광고를 싣는 것으로 충당한다.
안내도 한켠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광고 수익금의 일부는 앞 못보는 어린이의 개안 수술에 쓰겠습니다."
어릴 적부터 안경을 쓰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안보였다는 배씨가 동변상련의 심정에서 내건 공약이다.
[정경희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