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자] 추적(22)

기사입력 1998년 04월 24일 14시 05분


"주무시지 않으세요?"

요시에의 목소리에 이준석은 몸을 돌렸다. 벽에 기대선 그의 앞으로 요시에가 다가와 섰다.

짙은 어둠에 덮인 뜰에는 그들 두 사람 뿐이다.

"저는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학교는 영국과 독일에서 다녔죠."

요시에가 그의 옆쪽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어두운 앞쪽을 바라보았다.

"부모하고는 일년에 한 두번 만날 뿐이었어요."

가라앉은 그녀의 목소리는 여운없이 어둠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버지는 순수한 과학자였습니다. 전혀 돈을 모르는 분이셔서 어머니가 꽤 고생을 하셨지요."

요시에가 머리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어둠속이라 그녀의 흰창에 박힌 검은 눈동자가 더욱 선명했다.

"저는 꼭 그 장치를 찾아 대가를 받아낼 거예요. 아버지의 업적을 강탈해간 그자들을 방관할 수 없습니다."

이준석이 벽에서 등을 떼었으므로 그녀가 긴장을 했다. 공기가 흔들리면서 그에게서 땀냄새에 섞인 짙은 사내의 체취가 맡아졌다.

"당신의 사업은 방해하지 않겠소. 요시에씨."

목소리가 잠긴 때문인지 이준석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이제 난 이곳에서 필요없는 사람이오. 오늘 떠나겠어."

"어디로 가시게요?"

요시에의 목소리가 조금 팽팽해졌다.

"같이 있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혼자서는…."

"하마니의 위치는 이미 모든 정보기관에 알려졌을거요. 그러니 이제 그것이 비밀일 수도 없지."

이준석의 시선이 요시에의 눈동자에 정면으로 꽂혀졌다.

"난 혼자서 내 여자를 찾겠소."

"가네다씨가 승낙하지 않을 텐데요."

"당신의 생각도 그렇겠지. 내가 CIA나 한국측에 정보를 넘길지 모른다고 의심할 테지."

"가지 마세요."

요시에가 손을 뻗쳐 이준석의 팔을 쥐었다.

"전 당신을 의지하고 있어요."

"우린 한동안 같이 지냈지만 목적이 다릅니다."

부드럽게 팔을 당겨 요시에의 손을 털어낸 이준석이 소리없이 웃었다.

"난 내 목숨보다도 그 여자가 더 소중합니다. 찾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후회하지 않을거요."

소리죽여 숨을 뱉은 요시에가 반발짝쯤 물러섰다.

그러나 시선은 똑바로 그에게로 향해져 있다.

"연락처를 정해 주세요."

"한국대사관의 정대령에게."

자르듯 말한 이준석이 목소리를 낮췄다.

"난 아직까지 한국군인이오. 아무도 내 본분을 막을 수 없습니다."

잠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이윽고 요시에가 보일듯 말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가네다씨가 감시를 철저히 하라고 하더군요. 아마 지금도 집 안팎에서 이쪽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거예요."

"아마 쏘지는 못할거요."

이준석이 흰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가네다씨가 상황판단에 흐린 사람은 아닐테니까요."

"잠깐만요."

그리고는 요시에가 소리죽여 집안으로 들어가더니 잠시후에 다시 나왔다.

다가선 그녀는 이준석의 사파리 주머니에 묵직한 뭉치를 넣었다.

"버트 배낭에서 나온 달러예요. 모두 가져왔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