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자] 실종(20)

기사입력 1998년 03월 24일 15시 21분


수에즈에 도착한 것은 새벽 네시반이었다.

시가지에 들어서자 거리는 아직 짙은 어둠에 덮여 있었지만 간간이 차량들이 오갔다.

한적한 거리에 차를 세운 이준석은 길가의 공중전화 박스로 다가갔다.

동전을 넣고 다이얼을 누른 그는 길게 숨을 뱉었다. 지난밤에 한숨도 자지못한 것이다.

"여보세요?"

영어로 응답하는 목소리를 듣자 그는 긴장했다.

"거기 조남훈 영사댁입니까?"

그도 영어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난 이준석입니다."

한국어로 말한 이준석이 서두르듯 말을 이었다.

"부탁할 것이 있는데요. 영사님, CIA 요원이라는 사람을 확인하고 싶습니다만."

"그것보다 지금 어딥니까?"

조남훈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베어 있다.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압니까?"

"무슨 말씀입니까?"

"어젯밤 포트 사파카로 향하는 사막횡단 도로에서 이집트 정보요원 두명이 사살 되었어요. 그 용의자가 당신입니다."

"아니 그것은."

"지금 당신은 전국에 수배되어 있어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내가 살해범을 잡고 있습니다. CIA 요원 버트 모건이란 자인데요. 그자가."

"CIA 요원이라구요?"

"그래요. 그런데 내가 살해범이라니 그건 무슨 말입니까?"

"당국에 신고가 들어왔다는거요. 그래서 사건발생 직후에 경찰당국은 피해자를 찾아냈습니다."

"…."

"목격자는 동양인이 그들을 쏘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함정이다. 조남훈이 뭐라고 말을 하였으나 전화를 내려놓은 이준석은 트럭으로 서둘러 돌아갔다.

짐칸으로 다가간 그는 안을 들여다 본 순간 몸을 굳혔다. 운전사와 함께 누워 있어야할 버트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운전사만 두 눈을 껌벅이며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운전석으로 다가간 이준석이 굳은 표정으로 요시에를 올려다 보았다.

"내려요. 어서！"

금방 잠에서 깨어난 요시에가 눈을 껌벅였으나 잠자코 트럭에서 내렸다.

"어서 이곳을 떠납시다. 버트가 도망쳤소."

"언제요?"

놀란 요시에가 눈을 둥그렇게 떴으나 분주히 트럭에서 가방을 끌어냈다.

"수에즈 남쪽 50㎞ 지점에서 쉴적에는 그놈이 있는 것을 확인했으니까 그 후에 도망친거요."

제각기 가방을 둘러멘 그들은 서둘러 트럭에서 떠났다. 요시에가 흘끗 트럭을 돌아보았다.

"운전사는요?"

"아침이 되면 풀려나겠지."

빈 택시가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길가에 멈춰섰다.

"버트가 날 함정에 빠뜨리려고 처음부터 계획을 한 것 같소."

이준석이 조남훈에게 들은 이야기를 말해주자 요시에는 불안한 표정이었다.

"처음부터 계획적이었군요."

택시가 멈춰섰다. 그러나 요시에는 막 차에 오르려는 이준석의 옷깃을 당기고는 운전사에게 소리쳐 물었다.

"카이로까지 얼마요?"

"200불."

흰수염의 운전사가 손가락 두개를 폈으나 요시에는 한발짝 물러섰다.

"100불."

"그럼 150불."

요시에가 머리를 젓자 운전사가 말했다.

"알라의 뜻이라면 120불."

그들은 차에 올랐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