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대형차 최고급모델은 눈총받는다'
기사입력 1998년 03월 19일 15시 26분
"어느 마크를 달까요."
"기본급인 2.0으로 바꿔주세요."
부유층이 많이 살고 있는 서울 강남의 K카센터에는 승용차 트렁크에 붙어있는 모델 등급 마크를 바꿔달라는 의뢰가 심심치 않게 접수된다.
교체되는 마크는 최고급이 아닌 기본형.
현대 그랜저 승용차의 최고급 모델인 `V6 3000'의 마크를 기본형 으로 바꿔달면 영낙없이 `그랜저 2.0'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겉멋내기에 익숙해져 있지만 마크를 바꿔다는 사람들의 속셈은 정반대다.
`내용은 상관말고 겉모습대로만 봐달라'는 식이다.
승용차가 부의 기준이 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격'에 맞지 않는 고급차를 타기란 웬만한 배짱이 아니고선 엄두를 낼 수 없는 일.
그러나 마크를 교체하면 사정은 달라진다.
1만원 정도를 들여 마크를 교체하면 똑같은 그랜저라도 3천만원짜리 최고급 모델이 될 수 있고 한순간에 2천만원짜리 기본형으로 전락할 수 있다.
외양은 똑같으면서 마크만 다른 대우 레간자나 기아 포텐샤, 엔터프라이즈 등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특히 월급쟁이 중산층이 즐겨타는 레간자는 최상급 2.0DOHC의 주요 고객이 최소한 이사급이기 때문에 말단 직원들은 기본모델 마크인 1.8 SOHC로 슬쩍 바꿔치기를 하고 있다.
설령 바뀐 모델과 다른 기능이 있더라도 `옵션'이라고 해명하면 그만.
마크를 교체하는 사람의 신분은 대체로 중형차 이상은 무난한 돈많은 회사 중역.
직위 때문에 눈치가 보여 원하는 차를 탈 수 없는 이들은 최고급 승용차에 기본형 마크를 달고는 맘놓고 드라이빙을 즐기고 있다.
S사의 김모 상무는 "그랜저 3천cc를 타면 눈총을 받기 때문에 3천cc마크를 `2.0'으로 교체했다"면서 "`눈가리고 아웅하는 격'이지만 상사들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돼 마음이 편하다"고 말했다.
카센터를 찾는 사람중에는 재력가인 변호사나 교수 등도 적지 않다.
대형차를 몰다 자칫 의뢰인이나 학생들에게 청렴한 이미지가 손상될 것을 염려한 나머지 아예 차를 인도받는 즉시 정비센터를 찾아가 기본형 마크로 교체하고 있다.
H자동차 영업사원인 김모씨（31）는 "한 유명 대학교수는 승용차를 주문하면서 처음부터 마크를 바꿔달라고 부탁을 하더라"면서 "이런 광경을 볼 때마다 승용차에 따라 신분이 정해지는 것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고 말했다.
[권정식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