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청춘일기] 김종서(8)
기사입력 1998년 03월 18일 15시 17분
해가 바뀌고 나니 88년은 이미 우리의 세상이 아니었다.
이승철이 부활을 떠나 솔로로 데뷔했고 백두산이 해체, 리더였던 유현상 형이 신인가수 이지연을 키워 보겠다며 제작자로 나섰다. 그룹들이 줄줄이 해산하는 한편 박남정 소방차 등 댄스 가수들이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시나위도 보컬 김성헌을 영입, 3집을 냈지만 반응은 없었다. 이때 현상 형이 내게 "헤비메탈의 올스타 팀을 만들어 보자"고 제의, 이근형(기타) 박현준(베이스．현 삐삐 롱스타킹 멤버) 김민기(드럼)를 모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카리스마' 멤버들은 스러져가는 메탈 붐을 다시 살려보려는 의욕이 넘쳤지만 현상 형과는 처음부터 생각이 달랐음을 뒤늦게서야 알게 됐다.
카리스마는 데뷔 앨범을 내고도 단독 공연을 거의 갖지 못했다. 오히려 지방 공연에 이지연의 백밴드로 참가하는게 고작이었다. 자존심으로 버티던 우리에겐 결정타였다. 지금은 다 잊었지만 당시 현상 형에겐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카리스마를 해체한 뒤 나는 실업자가 됐다. 어쩌면 이 시기가 내게는 큰 약이 되었던 것 같다. 이때부터 나는 펑크와 재즈, 민속음악에서 힙합까지 수많은 장르의 음악을 들으며 지냈다.
다양한 음악을 접하며 조금씩 부끄러운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나는 로큰롤만을 알았고 그것만이 음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앞으로 음악을 한다면 지금까지완 다른 음악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89년 어느날, 대철이 한 소년을 데리고 찾아왔다. 기가 많이 꺾여 있는 듯했지만 의욕은 여전했다. "내가 누구랑 또 해보겠니. 다시 한번 해 보자."
같이 할 멤버라며 함께 온 소년을 소개했다. 정현철. 말수가 적고 얼굴은 백지장같았지만 안경 속의 눈빛은 유난히 빛났다. 한국 대중문화의 흐름을 바꿔놓은 `서태지' 정현철은 이중산 선배가 발굴한 베이시스트였다.
당시 기타리스트들은 즉석에서 프레이즈를 만들어 내는 대결을 즐겨 했는데 이중산 선배와 대철이 어느날 `결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때 현철의 연주를 유심히 본 대철이 "형, 쟤 나 줘" 하자 매사에 욕심이 없던 이중산 선배는 "그래"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온 앨범이 시나위의 4집. 신대철-김종서-정현철-오경환(드럼)의 라인업이었지만 활동은 정말 미비했다. 이미 록그룹들은 방송 출연은 커녕 공연 스케줄 잡기도 쉽지 않을 지경이 된 것이다.
나중에 솔로로 내놔 히트했던 `겨울비'가 이 앨범에 있던 노래였지만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니 말이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