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책]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
기사입력 1998년 03월 15일 15시 45분
프랑스어로 소설을 쓰는 체코 작가 밀란 쿤데라(69)의 신작소설 `정체성'(민음사)이 불문학자 이재룡 교수(숭실대)의 번역으로 출간됐다.
`농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느림' 등의 작품으로 국내에도 많은 독자를 갖고 있는 쿤데라의 이번 작품 역시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사색적이며 철학적이다.
소설은 흥미로운 스토리나 사건전개, 인물들간의 극적인 갈등이 보이지 않는 51개의 짤막한 장들로 구성돼 있다.
화자는 두 사람, 중년의 이혼녀 샹탈과 그의 애인인 장 마르크다. 그래서 이 작품은 `두 개의 목소리가 숨막힐 정도로 서로 얽혀 있는 이중창'이며 `한가지 테마를 두고 모습을 계속 달리하는 변주곡'이기도 하다.
샹탈은 외아들이 다섯살 나던 해 세상을 뜨자 이혼을 한다. 그녀는 자립을 위해 광고회사에 취직한 뒤 애인 장 마르크와 산다.
어느날 샹탈은 문득 어떤 남자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고 느끼고 이를 장 마르크에게 이야기한다. 장 마르크는 샹탈의 육체가 소멸되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의기소침해진 샹탈을 즐겁게 해주고자 익명으로 편지를 보낸다. 익명의 편지들은 바로 샹탈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찾아주기 위해 쓰여진 것이다.
소설에서 샹탈은 묻는다.
"삶의 위대성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이에요? 우리의 운명이 먹는것, 성교, 생리대에 달려있다면 우리는 누구일까요? 그리고 우리가 고작 이런 것만 할 수 있다면 흔히 말하듯 우리가 자유로운 존재라는 사실에 어떤 자부심을 느낄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은 물론 쿤데라의 질문이기도 하다.
쿤데라의 의외적인 작법은 이 작품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예를 들면 49장까지 그(장 마르크)와 그녀(샹탈)가 화자로 나오다가 50장에 이르면 느닷없이 `나'(작가)가 화자로 등장하는 따위가 그렇다.
[이승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