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1천800원짜리 하루
기사입력 1998년 03월 06일 15시 18분
명퇴자가 가장 멋있고 수준높게 하루를 보내는데 얼마나 들까?
단돈 1천800원이라면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난달 삼척동자도 알 만한 모 기업의 이사 자리에서 물러난 서울 행당동 박모씨（48）를 따라가 보자.
"다녀오세요."
오전 8시.
아내의 상큼한 인사를 뒤로 한 채 지하철역으로 향한 박씨는 2호선 삼성역에서 내린다.
무역센터가 목적지다.
무역센터에는 온갖 전시회가 끊임없이 열리고, 공짜로 관람할 수 있는 상설전시장도 있다.
사실 직장에 다닐 때야 꿈도 꿔보지 못했던 일이다.
그리고 설령 시간을 내서 갔다손 치더라도 `수박 겉핥기'에 지나지 않았을 게 뻔하다.
하지만 요즘 박씨는 현미경으로 세포조직 훑듯 전시품들을 꼼꼼히 살핀다.
가진 게 시간밖에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사업구상에 많은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오전은 금세 지나간다.
박씨에게는 화려한 점심식사가 보장돼 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무역센터 인근의 공항터미널 예식장.
주로 상류층이 이용하는 곳이다 보니 까다롭게 식사쿠폰을 검사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마음 편히 이용할 수 있다.
메뉴는 주로 스테이크.
맛깔스런 떡에 술과 음료도 풍성하다.
맥주라도 한잔 기울이면 더이상 부러울 게 없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결혼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잘 살라'고 빌어주는 일을 잊지 않는다.
근사하게 점심식사를 마친 박씨는 다시 2호선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두번째 행선지는 서초동 법원가다.
공판을 지켜보기 위해서다.
별의별 인간이 다 있고, 별의별 사건도 많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며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되새긴다.
공판장의 시계도 바깥 세상보다는 몇 배로 빨리 돈다.
거기에서 다뤄지는 온갖 사건들이 `불구경'이나 `싸움구경' 못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새 해거름.
서서히 출출해 질 시간이다.
물론 그 시간에도 박씨를 반갑게 맞을 우아한 공간이 마련돼 있다.
바로 강남의 각 호텔들이다.
호텔 역시 돈내음 풍기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곳이라 모든 게 화려하고 풍성하다.
그 호텔들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세미나도 열리고 파티도 벌어진다.
특히 각종 세미나는 공부가 될 뿐만아니라 많은 정보도 얻을 수 있어 참 좋다.
이따금씩 칵테일 파티라도 벌어지면 박씨의 저녁은 만족, 대만족이다.
그리고 귀가.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 지도 모른다.
결국 박씨가 어느 갑부 못지않게 환상적인 하루를 보내는데 투자한 돈은 450원짜리 지하철 4번 탄 게 전부다.
`450×4＝1,8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