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수첩] 광속 맞대결 ML도 놀란 '코리아 만세'
기사입력 1998년 03월 05일 13시 49분
미국 플로리다주 중서부의 소도시 포트 세인트루시에서 벌어진 한국 야구 잔치였다.
북쪽으로 다저 타운으로 알려진 베로비치와 남쪽으로 베벌리힐을 능가한다는 부촌의 상징인 웨스트팜비치라는 유명 도시 사이에 위치한 이 작은 도시에서 5일 또 하나의 야구 역사가 만들어졌다.
130년이 넘는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 사상 최초로 한국 선수들이 이날 동시에 마운드에 오른 것.
이미 메이저리그의 정상급 투수로 LA 다저스를 이끌고 있는 박찬호（25）, 그리고 뉴욕 메츠가 박찬호를 능가하는 선수로 키우겠다는 꿈을 키우고 있는 서재응（21）이 공수를 번갈아 마운드에 오르는 장면부터가 극적이었다.
소설보다 극적이라는 현실의 아이러니는 5회초 다저스의 공격에서 찾아왔다.
3대2로 메츠가 앞선 가운데 배번 61번의 박찬호가 헬멧을 쓴채 방망이를 어깨에 얹고 타석에 들어서자 98번 배번이 뚜렷한 서재응은 포수의 미트만 노려보았다.
서재응의 손을 떠난 직구가 포수 카스티요의 미트에 도착하기 직전 박찬호의 방망이가 힘껏 돌아갔고, 경쾌한 파열음과 함께 하얀 야구공은 좌측 펜스를 순식간에 넘어가 버렸다.
투수들이 벌인 투타의 대결이라는 어설픈 설정에도 불구하고 너무 극적인 드라마가 연출됐지만 이날 두명의 한국 청년들이 보여준 자신들의 본업인 `공던지기 대결'은 사실 더욱 극적이었다.
박찬호는 아직 모든 면에서 서재응을 압도하는 관록과 자신감에 넘치는 인상적인 투구를 했다.
4이닝을 던지며 무사 2,3루의 위기마저 연속 삼진을 곁들여 무실점으로 처리한 박찬호의 투구 내용은 양팀 코칭 스태프와 선수들이 `역시 찬호！'라는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직구의 위력은 이미 시즌 중반의 물에 오른 위력을 뿜어냈고, 커브의 낙차와 컨트롤은 타자들이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가 멍청히 삼진을 먹는 장면을 연출했으며, 새로 장착한 체인지업에는 손도 대지 못했다.
그러나 서재응의 패기와 잠재력도 `제2의 박찬호'를 꿈꾸는 메츠의 희망이 전혀 무리가 아님은 보여주었다.
2이닝 동안 4연속 타자를 포함, 5개의 삼진을 잡은 서재응은 뛰어난 제구력과 코너워크, 그리고 무엇보다 과감한 승부가 돋보였다.
9명의 타자중 7명에게 초구 스트라이크를 꽂았고, 홈런을 맞은 직후에도 곧바로 스트라이크 승부를 펼치는 투혼은 `과연 저 선수가 20세짜리 애송인가'라는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피아자에게 그가 가장 좋아하는 바깥쪽 높은 직구를 꽂은 것이나 선배 투수 박찬호에게 가운데 평범한 직구를 던져 홈런을 얻어맞은 것은 메츠 코칭스태프가 `차라리 일찍 맞은 매'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정도로 좋은 경험이기도 했다.
이날 한국 투수들에 앞서 나온 메츠의 요시이 마사토나 다저스의 노모 히데오의 투구 내용과 비교해 박찬호, 서재응이 보여준 역투가 훨씬 생동감 있고 극적이었다는 것은 관중들의 반응에서 그대로 나타나 그 역시 기분 나쁜 일은 아니었다.
메이저리그 정상을 향해 치닫는 박찬호와 그에 못지않은 잠재력으로 메이저리그를 향해 질주하는 서재응이 함께 연출한 이날의 드라마를 한국 팬들이 생중계로 관전하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쉬울 정도였다.
[포트 세인트루시(미 플로리다주)=민훈기 특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