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여옥의야구세상] '해약 충격' 정석 힘내라
기사입력 1998년 03월 04일 14시 14분
잡지사에서 패션기자로 일하던 친구가 하루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있잖니, 서양에서 자라는 것이 사람을 강하게 하는 것 같아. 왜 중고교때부터 미국에서 자란 모델 A있지, 한달에 한번씩은 `혹시 이번달에 저 쓸 일 없으세요?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세요'라고 꼭 전화를 해."
그렇다고 그 A가 영 팔리지 않는 모델도 아니다.
슈퍼모델은 아니지만 일급모델은 족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렇게 자기 자신을 열심히 세일즈하고 있다. 조금만 이름이 나면 촬영장소에 한시간씩 늦게 나타나는 우리네 모델들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것이다.
"문제는 글쎄, 직업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하는 일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보는 의식이지. 우리 같으면 어디 쑥스러워서 전화같은 거 걸기 좀 뭐하잖아."
나도 그런 생각에 동의했다.
내가 일본에 있을 때 일본계 미국인 앵커 B가 있었다.
그는 당시 일본방송국에 아주 좋은 조건으로 스카우트돼 영어뉴스 방송의 진행자로 와 있었다.
방송계에도 야구계와 마찬가지로 물갈이 시즌이 있다.
편성시즌이라고 하는데 대개는 아무리 톱 클래스라고 해도 긴장하고 `이번에는 내차례?'하며 속으로는 부들부들 떨게 마련이다.
어느날 B를 우연히 만났는데 그 역시 내심 불안해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를 붙들고 하는 그 다음말이 재미있었다.
그는 아주 솔직하게 말했다.
"지금 C방송국이 나를 해고할 지도 모르는데 혹시 너희나라는 영어방송을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적극적으로 그간의 이력을 들먹이면서 스스로 얼마나 노력하는 `앵커'인지를 거의 30분에 걸쳐 내게 설명했다.
나는 그가 그처럼 자기라는 상품을 갈고 닦아 이렇게 열정적으로 파는 자세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프리랜서의 자세이고 프로페셔널의 자세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일본에서는 잘렸지만 미국의 유수한 방송사에서 일본에서 받던 것의 3배나 되는 연봉을 받고 지금은 `세계의 정상'을 향해 가고 있다.
한때의 좌절은 프로를 더 화려하게 만들곤 한다.
그렇게 화려하게 입단식까지 가졌던 정 석이 LA다저스로부터 입단 계약을 파기당했다.
일단 정 석으로서는 정신적인 충격이 클 것이다.
다저스는 지난주 신체검사에서 어깨부상이 발견돼 해약을 통고했다.
다저스는 정 석을 자유롭게（?） 풀어주면서 만일 다른 구단에서 받아주지 않으면 100만달러보다는 훨씬 싼값에 재계약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한편에서는 다저스의 `흠집잡아 몸값깎기'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프로의 세계, 직업의 세계에서 당연한 일이다.
우리 국민 모두가 미국식 고용체제를 받아들여（반드시 좋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지금 고통을 겪고 있다.
정 석 역시 바로 우리 국민들이 겪고 있는 IMF식 고통과 좌절을 미국현지에서 겪고 있다.
프로가 되기 위해 그가 거쳐야 되는 통과의례라고 그는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이 어려움을 잘 넘기면 그는 달궈진 쇠처럼 더욱 더 강인해질 것이다. `세계화' `전문화'라는 이름아래 고통을 겪고 있는 한국 국민들처럼－.[방송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