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웅] 대세(6)
기사입력 1998년 02월 22일 14시 30분
이역만리 고향을 떠나 대륙 중심부의 산설고 낯선 땅에서 그것도 온갖 곡절과 사연을 함께 품은 남녀가 다시 만났으니 서로의 가슴에는 만감(萬感)이 교차했다.
김영은 오래 울었는데 그것은 만남의 기쁨 보다도 지난 세월에 쌓인 정한(情恨)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윤의충에 대한 사랑을 스스로 확인 할 수 있었다.
카라차르의 따뜻한 애정에 의하여 덮여졌던 윤의충에 대한 사랑이 물밀듯 솟아 올랐고 그것에 또한 죄의식으로 온몸이 조여졌다.
그들은 청으로 들어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전(前)성주의 부인과 새 성주가 대면하는 공식적인 자리여서 주위에는 시종들과 관리들이 둘러 서있다.
김영은 이제 눈이 붉었지만 차분해진 모습이었다. 윤의충이 몽골어로 말했다.
"형님께선 나에게 후사를 부탁 하셨소. 부디 형수께선 몸을 아끼시어 가계를 잇기 바랍니다."
잠자코 있는 김영에게 그가 말을 이었다.
"형수님의 숙소는 그대로 이곳으로 할것이고 그리고 나는 성안에 거처를 마련 하겠소. 곧 북방으로 출정해야 할터이니."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입가를 비틀고 웃었다.
"나는 원제국의 북방군 총사령이 되었소이다. 하이도의 반란군을 막는 것이 내 임무요."
김영이 머리를 끄덕였다.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몽골 관습에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는다는 것을 김영이 모를 리가 없다.
전장에서 카라차르의 제의로 형제의 의를 맺었다는 사실이 김영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했다.
카라차르는 김영의 마음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김영이 윤의충의 말에 따른다는 의미는 곧 몽골 관습에 따른다는 뜻도 되었다.
둘러선 시종들의 표정이 기대에 찼고 관리들의 자세는 더욱 공손해 졌다.
북방군 총사령의 부인에 대한 예우를 갖추려는 것이다. 윤의충이 김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는 이제까지 떠돌았으나 곧 정착할 것이오."
이제는 고려말이어서 주위의 사람들은 귀만 세웠다.
"새로운 땅을 얻어 뿌리를 내릴테니 따라와 주시겠소?"
"어디든 따라 가겠습니다."
김영이 다시 목이 메었다.
"이제는 결코 헤어지지 않겠습니다."
머리를 끄덕인 윤의충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려면 몸을 보중해야 하오."
감숙행성은 왼쪽이 토번땅이요. 북쪽은 광활한 대륙으로 오고타이 가계의 하이도가 종횡으로 누비는 영북지방이다.
성안의 거처로 돌아온 윤의충은 곧 내치(內治)를 시작했다.
백성들을 안돈시키고 군사를 정비하여 출정에 대비 하려는 것이다.
다행히 카라차르의 죽음으로 동요했던 백성들의 분위기는 금방 가라 앉았는데 윤의충의 명성 때문이다.
백성들은 고려인으로 용맹을 떨친 윤의충을 오히려 흠모 했는데 그것은 몽골 지배계급에 대한 반감 때문일 것이다.
며칠이 지난 어느날 청안에 앉아있던 윤의충은 문득 머리를 들었다.
한낮이었고 주위에는 관리들이 수십명이 있었지만 그의 눈빛을 알아챈 사람은 없다.
이윽고 그가 입술만을 움직여 말했다.
"향비, 당신인가?"
그러자 꽃잎 하나가 마치 나비처럼 나풀거리며 청의 한가운데로 떨어졌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