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웅] 대세(5)
기사입력 1998년 02월 20일 16시 26분
정원의 화초는 만발했고 수목 사이에서 새들은 한껏 목소리를 뽐내었다.
정원 한쪽에 만들어진 연못 위로 나비떼가 날아갔다. 거울처럼 반반한 표면이어서 나비떼는 제 그림자와 함께 날아갈 것이었다.
한낮이다. 김영은 연못가의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카라차르의 전사소식이 전해진 것은 한달 전이었다.
그날 이후로 김영은 연못가의 바위에 앉아 연못을 바라보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카라차르는 한수가에 묻혔고 돌아온것은 그가 입던 갑주와 칼 한자루 뿐이었다.
성주를 잃은 감숙성 백성은 깊은 절망감에 빠졌는데 그것은 카라차르가 인덕이 있는 영주였기 때문이다.
전란 중에 인덕있는 영주 치하에서 산다는것은 복이다. 김영은 가늘게 숨을 뱉었다.
보름전에 감숙성주 겸 북방군 총사령에 윤의충이 임명되었다는 전갈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틀전에 윤의충은 감숙성에 부임해 왔다.
종들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들으면 사납고 용맹스러운 풍모에 휘하 장졸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듯이 높다고 했다.
그는 원제국의 병마절도사를 두명이나 죽였는데도 황제에 의하여 중용이된 사람이다.
그런 말을 들을만도 했다.
갑자기 뒤쪽이 소란스러워지더니 여종 서너명이 곤두박질을 치듯이 이쪽으로 달려왔다.
덜컥 가슴이 내려앉은 김영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졌다. 윤의충이다. 그가 온 것이다.
"아씨마님, 절도사 나리께서 오셨습니다."
숨이 차 허덕이며 앞장선 여종이 소리쳤다.
바위에서 일어선 김영은 종들의 뒤쪽, 사랑채를 돌아나오는 일단의 관리들을 보았다.
그중에는 갑옷 차림의 장수들도 섞여 있었는데 이윽고 그들은 사랑채 옆에서 모두 멈춰섰다.
그리고 그들 사이를 헤치고 흰 장삼에 머리에는 두건만 쓴 사내 하나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윤의충이다. 김영은 석상처럼 굳어진채 그를 바라보고만 서 있었다.
이윽고 윤의충은 그녀의 세발짝쯤 앞에와 섰다. 그의 번들거리는 시선이 김영의 시선과 엉켜졌을 때였다.
다음 순간 윤의충은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땅바닥을 짚은채 김영을 올려다 보았다.
"형수님, 문안 드리오."
그의 목소리는 떨렸다.
"그동안 얼마나 심려가 크셨소이까?"
이윽고 그의 부릅뜬 눈에서 굵은 눈물줄기가 흘러내렸다.
"소제, 이렇게 찾아 뵙다니 참으로 가슴이 찢어질것 같소이다."
곧 김영의 눈에서도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그러나 목이 메어 말을 못한다.
"형님과는 진중에서 형제의 의를 맺었소이다. 형님께서는 형수님과 아이를 부탁 한다는 유언을 남기셨소."
그러자 김영이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영문 모르는 여종들이 뒤쪽에서 소리죽여 울었고 새들은 어느덧 울음소리를 내지 않았다.
윤의충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붉어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제 낭자를 놓치지 않을 것이오."
이것은 고려말이다. 입술만을 달삭여 말했지만 김영은 다 들었다.
"그리고 뱃속의 아이까지 내가 목숨을 걸고 지켜줄테니."
눈을 치켜뜬 그가 뒤에선 여종들을 향해 소리쳤다.
"무엇들 하느냐！ 아씨를 안으로 모셔라！"
이것은 몽골말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