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노영웅] 고통없는 영광은 없다
기사입력 1998년 02월 19일 15시 31분
올림픽은 한편의 드라마다.
아니 드라마보다도 더 극적이다.
그래서 메달리스트들은 나름대로의 사연을 갖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올림픽 메달은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대 올림픽이 그랬듯이 이번 제18회 나가노동계올림픽도 갖가지 사연들을 품은 스타들이 즐비했다.
◇시미즈 히로야스(23．일본．스피드스케이팅)
스피드스케이팅 500m에서 금메달을 따낸 일본 시미즈의 체격은 1m61, 65㎏.
빙상선수로는 도저히 상상이 안되는 왜소한 체구다.
그래서 세계 빙상인들은 그의 우승을 일컬어 `땅콩의 승리'로 표현했다.
그동안 스피드스케이팅 단거리 종목은 건장한 몸집의 서구선수들의 독무대였던 게 사실이다.
따라서 시미즈의 세계 제패는 일본인들 조차 믿기지 않는 `기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시미즈가 지구촌을 떠들썩하게 만들며 `작은 거인'의 신화를 이루기까지는 세상을 떠난 아버지 히토시씨의 혹독한 스타르타식 훈련과 눈물겨운 `사랑의 매질'이 있었다.
시미즈가 처음 스케이트를 신은 것은 세살되던 78년 겨울. 아버지 히토시씨는 걸음마를 뗀 지 얼마안된 시미즈를 얼음판으로 내보낸 것이다.
그리고 아들에게 여름엔 롤러스케이트, 평소엔 나막신 `게다'를 신겨 남들보다 2배가량 튼튼한 허벅지 근육을 갖출 수 있게 했다.
눈을 감는 순간에도 "네가 있어야 할 곳은 병원이 아니라 얼음판"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집념 어렸던 아버지에 의해 시미즈는 단신의 핸디캡을 극복하고 마침내 세계 최고의 스프린터로 탄생했던 것이다.
◇헤르만 마이어(26．오스트리아．스키 알파인)
`몬스터' 혹은 `헤르미네이터(헤르만＋터미네이터).'
오스트리아의 `스키 황제' 헤르만 마이어에 따라붙는 수식어다.
인간의 본능마저 무시하는 과감한 활주장면을 보고 붙인 별명이다.
유력한 금메달 후보로 꼽히던 그는 지난 13일 활강 경기 도중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넘어지면서 두겹의 안전망을 뚫고 떼굴떼굴 굴러 처박혔다.
그로부터 3일후인 16일 슈퍼대회전. 생전 처음 당한 망신에 자극 받은 `천재'는 달라져 있었다.
폭발적인 스피드를 앞세워 1분34초82로 우승.
월드컵시리즈 9차례 우승을 비롯해 각종 대회의 화려한 경력과 달리 올림픽에서는 `불운의 스타'로 통하던 그가 처음 목에 건 올림픽 금메달이었다.
마이어는 15세때 부상으로 오스트리아 선수양성 프로그램에서 탈락한 뒤 벽돌공과 스키강사로 근근히 살아왔다.
그러다 지난 96년 월드컵투어에 눈을 다지기 위한 전주자(前走者)로 나갔다가 발탁돼 일사천리 스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m80, 90㎏의 우람한 체구에 모터사이클 타기와 축구가 취미인 마이어는 "이제 올림픽에서도 몬스터"라고 당당히 외친다.
◇게오르크 하클(31．독일．루지)
지난 9일 썰매를 타고 1.2㎞의 얼음트랙을 미끄러져 내려오는 루지에서는 동계올림픽 사상 6번째의 `3회 연속 우승'이라는 금자탑이 세워지고 있었다.
`스피딩 소시지' 게오르크 하클.
1m72, 81㎏의 체구에 나이까지 들어보여 마치 선수가 아닌 임원으로 보이지만 그는 분명 세계 최고의 루지선수였다.
올림픽 3연패 외에도 세계선수권대회 3회 우승, 월드컵 2회 우승 등 굵직한 대회서의 메달은 모두 그의 것이었다.
워낙 독주를 하다보니 다른 선수들로부터 질투를 받았다.
이번 나가노올림픽에서도 그는 금메달과 같은 노란색의 부츠를 신고 출전했다가 라이벌들이 `공기저항을 줄이기 위해 고안된 불법 부츠'라고 조직위원회에 고발하는 바람에 한바탕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런 시련 외에도 그는 올림픽을 4개월여 남겨놓고 등수술을 받아 훈련을 중단, 3연패 달성이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20년 루지인생을 살아온 그는 해냈고 사실상 그가 진두지휘해 온 독일팀의 다른 선수들은 루지에 걸린 남은 2개의 금메달을 모두 따내 다시 한번 명성을 떨쳤다.
◇라리사 라주티나(33．러시아．스키 크로스컨트리)
스키 여자 크로스컨트리에서 3관왕의 위업을 달성한 라리사 라주티나는 `주부 스키어'.
5㎞ 클래식과 10㎞ 프리스타일에 이어 20㎞ 계주서 설원을 질주, 남편과 8살된 딸 알리샤에게 3개의 금메달을 안겼다.
지난 95년 캐나다 세계선수권대회에서 3관왕에 오른 뒤 그녀는 운동과 집안 살림을 병행하기 위해 대표팀 합숙소를 뛰쳐 나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주위의 만류를 무릅쓰고 독자 프로그램에 따라 그동안 눈밭에서 구슬땀을 흘린 결과 마침내 3관왕의 금자탑을 쌓았다.
스키선수로는 가냘픈 1m67, 57㎏의 체구지만 보통 사람의 2배 정도에 이르는 폐활량에서 뿜어져 나오는 지구력이 최대무기다.
또 패배를 용납할 줄 모르는 강인한 승부 근성도 매섭다.
11년째 대표로 활약하고 있는 러시아의 간판스타인 그녀의 직업은 스포츠 인스트럭터이며 뜨개질 독서 음악감상이 취미다.
[나가노=김석현 특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