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성의 풍속사] (42)실험결혼
기사입력 1998년 02월 18일 15시 31분
30대 무정자증 환자가 아내의 외도로 낳은 딸 때문에 5년여 동안 고민해 왔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 11일 대구에 사는 김모씨(36)가 "나는 무정자증 환자여서 아내가 낳은 딸은 내 아이가 아니니까 장인 장모가 알아서 하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사건이다.
김씨 부부가 중세 유럽인들처럼 실험결혼을 먼저 했더라면 비극을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중세 유럽인들은 상대방이 애를 낳을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실험결혼을 했다.
쉽게 말하면 남자가 씨 없는 수박인지, 여자가 석녀에 돌밭인지 알아보기 위해 식을 올리기 전에 먼저 살아본 것이다.
농경사회였으니 애를 많이 낳아 일손을 늘릴수록 유리했을테고, 의술 또한 발달하지 못해 유아사망률이 높았으니 그런 실혼결혼 풍습이 자연스레 생겼을 것이다.
이런 풍습은 결혼에 관한 교회의 규율을 확립한 트리엔트 종교회의(1545∼1563)가 열리기 전까지 계속됐다.
그러나 실험결혼 전통은 그 뒤로도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던 모양이다.
영국에는 예비신부가 권위있는 부인 앞에서 나체가 되어 품평을 받는 풍습이 있었다.
1887년에 간행된 G 폰 분젠의 `요크셔에서의 실험결혼과 공동생활' 또한 실험결혼의 풍습을 전해주고 있다. 분젠의 책은 "네가 만약 임신을 하면 너를 아내로 맞이하리라"라는 한 남자의 서약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실험결혼을 통해 씨없는 수박으로 밝혀지거나, 석녀로 확인되면 결혼은 없었던 일로 돼버렸다. 남자의 경우 씨없는 수박은 물론이요, 임포텐츠 환자로 판명돼도 역(逆)소박을 맞아야 했다.
16세기 인물인 토머스 무어는 `유토피아'에서 "결혼 전에는 충분히 품평을 한 연후에 여자와 결혼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토머스 무어의 주장은 이런 것이다.
"사람은 작은 집 한 채를 살 때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평생의 행과 불행이 걸려있는 아내를 고를 때 손으로 겨우 가릴 수 있는 얼굴 밖에 보지 않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이같은 주장은 나름의 합리성이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당시나 지금이나 기독교인은 성직자 입회하에 결혼식을 올리면 불임여성이거나 임포남성이거나 이혼은 꿈도 꾸지 못하는 것이다.
현대 구미의 후손들은 실험결혼이나 계약결혼을 선호하는 추세다. 네가 나를 모르고 내가 너를 모르니 일단 한번 일정기간 살아보고 정식 결혼식을 올리자는 것이다. 조상들이 씨없는 수박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면, 후손들은 성격을 알아보기 위해서다.
아직 우리 관념에는 어색한 주장이지만 얼마전에 나온 `살아보고 결혼합시다'(명진출판 간)같은 책은 실혼결혼에 대해 호의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