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웅] 대세(3)
기사입력 1998년 02월 18일 15시 31분
그날밤 황제의 대형 진막 안에서 연회가 시작되었다.
수백명의 장군과 관리들이 황제를 중심으로 벌려 앉았는데 서역에서 데려온 무희들이 중앙의 무대에서 현란한 춤을 추었고 악사들은 갖가지 악기를 연주하며 흥을 돋우었다.
각자의 상에는 산해진미가 가득찼고 시종들은 쉴새없이 술과 음식을 날라왔다.
몽케칸 시절에는 이런 일이 없었으나 쿠빌라이는 현실적인 칸이었다.
장수들의 긴장감을 가끔씩 이런식으로 풀어주곤 했다. 장수들 사이에 끼어앉은 여자들은 갖가지 인종이었다.
한인과 서역인 또는 눈처럼 흰 피부에 푸른 눈의 여자도 있었고 온몸이 숯처럼 검은 여자도 있다.
윤의충의 좌석은 서열순이어서 황제의 오른쪽 네번째 였으니 왼쪽 네번째의 정벌군 총사령 바얀과 동격이다.
파격적인 승진이었지만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다. 황제의 명이면 개도 장군이 된다.
푸른 눈의 여자가 따르는 술잔을 받던 윤의충의 뒤로 근위장수가 다가와 섰다.
그가 윤의충의 귀에 입을 가져다 댔다.
"총사령, 폐하께서 부르시오."
자리에서 일어선 윤의충이 쿠빌라이의 세발짝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쿠빌라이가 손에 든 잔을 내밀었다.
"잔을 받으라."
순간 주위의 소음이 뚝 그치더니 모든 시선이 그들에게 집중되었다.
지금까지 황제의 잔을 받은 사람은 서너명 밖에 없다. 더욱이 황제가 마시던 잔을 주는것은 서로의 몸이 닿는것을 말한다.
무릎걸음으로 다가간 윤의충이 잔을 받자 쿠빌라이는 옥병에 든 술을 부어주었다.
황제가 친히 술을 부어준 것이다.
"마셔라."
윤의충은 한모금에 술을 삼켰다.
"잔은 네가 가져라."
쿠빌라이가 정색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넌 의(義)가 있고 충(忠)이 배어있는 사내다. 짐은 너를 믿는다."
"황공하오."
"고려인의 기개를 보여라. 짐은 고려를 생각 할때마다 너를 떠올릴 것이니."
"보이겠소이다."
"하이도가 유혹할 것이다. 향비도 찾아올 것이고."
"폐하께 충성 하겠소이다."
"먼곳을 보면 될것이다. 이것이 짐이 너에게 주는 교훈이다."
이제까지 황제에게 이런 대우를 받은 장수가 없다. 자리로 돌아온 윤의충은 길게 숨을 뱉었다.
그리고 아직도 손에 쥐고 있던 옥잔을 가슴에 넣었다. 풍악이 다시 시작되었고 웃고 떠들썩한 목소리들이 높아졌다.
다시 푸른 눈의 여자가 따르는 술잔을 들었던 윤의충의 시선이 문득 입구쪽의 말석에 머물렀다.
고려군 사령인 대장군 한석기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윤의충은 그를 향해 잔을 들어 보였다.
당황한 한석기가 두 손으로 잔을 들었고 윤의충과 함께 잔을 비웠다. 한석기는 곧 고려로 회군할 것이었다.
전상자를 이천여명만 내고 돌아가게 된것이다.
돌아가면 황제 폐하를 모신 오늘 이자리의 이야기를 끝없이 길게 늘어 놓을 것이었다.
윤의충은 이제 대원제국의 북방군 총사령으로 고려왕 왕식이 감히 머리를 들어 쳐다 볼 수도 없는 신분이 되었다.
한모금에 술을 삼킨 윤의충은 길게 숨을 뱉었다.
감숙성에서는 김영이 지아비의 전사소식을 듣고 있을 것이었다.
[계속]